[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보나벤투라 성인은 1221년 무렵 이탈리아 에트루리아의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저서를 많이 남기고, 1274년 무렵 선종하였다. 식스토 4세 교황께서 1482년 시성하시고, 1588년 ‘교회 학자’로 선포하셨다.
입당송
에제 34,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또는>
루카 12,42 참조
이 사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주님이 그를 세우시어,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 주게 하셨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며 비오니 저희가 그의 높은 지혜와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며 언제나 그의 불타는 사랑을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물에서 건져 냈다고 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그는 자란 뒤,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2,1-15ㄴ
그 무렵 1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길렀다.
3 그러나 더 숨겨 둘 수가 없게 되자,
왕골 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4 그리고 아기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기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5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공주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보고,
여종 하나를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다.
6 그것을 열어 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였다.
7 그러자 아기의 누이가 나서서 파라오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공주님 대신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하나 불러다 드릴까요?”
8 파라오의 딸이 “그래, 가거라.” 하자,
그 처녀가 가서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왔다.
9 파라오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기를 데려다 나 대신 젖을 먹여 주게.
내가 직접 그대에게 삯을 주겠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였다.
10 아이가 자라자 그 여인은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다.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11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12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다.
13 그가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자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 하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모세는 “이 일이 정말 탄로 나고야 말았구나.” 하면서 두려워하였다.
15 파라오는 그 일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9(68),3.14.30-31.33-34(◎ 33 참조)
◎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발 디딜 데 없나이다. 깊은 물속에 잠겨, 급물살이 저를 덮치나이다. ◎
○ 주님, 저의 기도가 당신께 다다르게 하소서. 은총의 때이옵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 ◎
○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
○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
복음 환호송
시편 95(94),7.8
◎ 알렐루야.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알렐루야.
복음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3,14-19)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복음 묵상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장소인 코라진, 카파르나움, 베싸이다, 이 마을들은 예수님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역이죠. 거기서 제자들도 불렀고, 여러 가지 기적들도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 고을들을 크게 꾸짖습니다. 불행하고 저승에까지 떨어지고 심판 날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은총이 불행으로, 기적이 심판으로, 생명이 죽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을 가까이 체험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던 고을들인데, 무엇이 그들에게 죽음의 그늘을 가져오게 했을까요? 기적은 일어났지만, 정작 자신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라는 건, 내 몸과 마음, 내 존재 자체를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다시 방향을 돌리는 게 바로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성찰을 요구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를 기리며 거룩한 제대에 바치는 이 제물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제물이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1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또는>
루카 12,36-37 참조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깨어 있는 종!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로 힘을 얻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를 본받아 그가 믿은 진리를 고백하고 그가 가르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거점입니다. 코라진은 카파르나움에서 북쪽으로 삼 킬로미터 떨어진 아주 가까운 도시이고 벳사이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입니다. 이 세 도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과 활동을 아주 가까이에서 자주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하신 것처럼 먼저 사랑의 표징으로 치유의 기적을 이 고을 사람들에게 베푸셨고, 그들은 기쁨과 해방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면서 자기에게만 머물러 있다면, 이는 하느님 없는 삶, 죄의 삶으로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불행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꾸짖으신 것입니다.
단죄와 저주는 내치는 행위이지만, 꾸짖음은 행동을 고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마태 11,21)라고 하실 때 사용된 낱말은 장례식 때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는 낱말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죽음의 상태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슬프고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11,23)라는 말씀에는 마치 떼쓰고 고집부리는 아이를 무섭게 겁주는 듯한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잘못된 고집을 버리기를 바라서 엄하게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대로 하려고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바라봅시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