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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생활

Catholic Life

매일미사
[홍]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이다. 어부였던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 가운데 하나다.
열두 사도에는 야고보가 둘 있는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소) 야고보’와 구분하여 ‘큰(대) 야고보’라고도 부른다. 야고보 사도는 42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특히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공경을 받고 있는데, 그곳에는 사도의 이름으로 봉헌된 유명한 성당이 있다.
  입당송
마태 4,18.21 참조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야고보 사도가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게 하셨으니 그의 영광스러운 증거로 교회를 튼튼하게 하시며 하느님의 보호로 교회를 지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6(125),1-2ㄱㄴ.2ㄷㄹ-3.4-5.6(◎ 5)
◎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5,1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사도행전은 야고보의 죽음을 전합니다. 헤로데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야고보를 해쳤던 것이지요. 결국, 야고보는 권력을 탐하는 사람에게 희생된 셈입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야고보도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의 어머니는 두 형제의 자리를 청했고, 다른 제자가 그것을 두고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다투고 있는 제자들은 똑같이 높이 오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자들은 하나 할 것 없이 권력과 명예를 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 안에는 밝은 모습과 어두운 모습이 함께합니다. 야고보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사도이자 순교자이지만, 어느 시기에는 자신이 초대받은 자리를 잘못 생각하고 힘이나 자리를 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힘을 탐하는 이에게 희생되었습니다. 
야고보를 순교자요 사도로 기억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요. 그가 주님께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신앙인들에게 어떤 모범을 보였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물 기도
주님, 복된 야고보 사도가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성자께서 마신 수난의 잔을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를 기억하며 바치는 이 제사를 받으시고 성자의 수난으로 마련하신 구원의 세례로 저희를 깨끗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도 감사송 1 : 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그들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복된 야고보 사도 축일에 천상 양식을 기쁘게 받아 모시고 비오니 그의 전구로 저희를 지켜 주시고 마침내 주님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 어머니를 통하여 앞으로 올 예수님의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염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마태오 복음서 16장에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였고 그들의 바람은 메시아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너무나 세속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 잘못된 인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 “종”(마태 20,26.27)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과, 당신께서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0,28)라는 말씀으로 메시아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더욱이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 바로 다음에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수난의 뜻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시는 모습은 나중에 실현될 무엇이 아니라,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이제 곧 그 수난이 시작될 예루살렘 입성(21,1-11 참조) 바로 앞에 있습니다. 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분 곁에서 그분을 지켜보고 느끼고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분을 모르니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호통치시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가까이”(20,25) 부르시고 부드럽게 타이르십니다. 그분께서는 ‘종’으로서, ‘섬기는 사람’으로서 계시기에 제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그들 수준에 맞추어 온화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신의 죽음에서 가장 잘 드러날 것입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