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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생활

Catholic Life

매일미사
[백]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베르나르도 성인은 1090년 프랑스 디종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시토회에 입회하였다. 나중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어, 몸소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유럽 각지를 두루 다니며 평화와 일치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1153년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께서 시성하셨고, 1830년 비오 8세 교황께서 ‘교회 학자’로 선포하셨다.
  입당송
주님은 복된 베르나르도를 지식의 영으로 가득 채우시어, 하느님 백성에게 풍성한 가르침을 전하게 하셨네.
  본기도
하느님, 복된 베르나르도 아빠스가 하느님 집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라 교회에 빛을 비추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도 불타는 열정으로 언제나 빛의 자녀답게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임금이신데도 “임금이 우리를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소(1사무 12,12 참조).>
▥ 판관기의 말씀입니다.9,6-15
그 무렵 6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스켐에 있는 기념 기둥 곁 참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
7 사람들이 이 소식을 요탐에게 전하자,
그는 그리짐 산 꼭대기에 가 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스켐의 지주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그대들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8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나무들이 길을 나섰다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네.
9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0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2 그래서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4 그래서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5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대답하였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1(20),2-3.4-5.6-7(◎ 2ㄱ)
◎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당신 구원으로 얼마나 즐거워하나이까! 당신은 그 마음의 소원 이루어 주시고, 그 입술의 소망 내치지 않으셨나이다. ◎
○ 은혜로운 복으로 그를 맞이하시고, 그 머리에 순금 왕관을 씌우셨나이다. 그가 당신께 살려 달라 빌었더니, 영영 세세 긴긴날을 주셨나이다. ◎
○ 당신 구원으로 그 영광 크오며, 당신이 존귀와 영화를 내리시나이다. 그를 영원한 복이 되게 하시고, 당신 앞에서 기쁨이 넘치게 하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히브 4,12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 알렐루야.
  복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집회 15,1-6)와 복음(요한 17,20-26)을 봉독할 수 있다.>
  복음 묵상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이 샘을 냅니다. 종일 일해서 받을 일당을 저녁에 잠시 일한 이들이 받아 가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일한 이들은 힘이 빠집니다. 종일 일한 사람과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의 보수가 같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의한 일 같습니다. 하지만 포도밭 주인은 불의하지 않습니다. 포도밭 주인이 모든 일꾼에게 약속한 일당은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는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더 받겠거니 생각한 것은 그들의 기대일 뿐이지요. 그들은 약속보다 적게 받은 게 아닙니다. 포도밭 주인은 모두에게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인간에게는 받은 것에 비해 준 것을 더 크게 기억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런 습성이 사람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지요. ‘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보상이 없느냐?’ ‘나보다 못한 너는 왜 나만큼 보상받느냐?’ 이렇게 꼼꼼히 셈을 하는 습성이 하느님 앞에서도 불거집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 자체를 보상으로 여겨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우리의 보상입니다. 따로 상급을 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이지요. 우리는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포도밭에 머무릅니다.
  예물 기도
주님, 말과 행동으로 교회의 화목을 위하여 헌신한 거룩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기념하며 주님께 일치와 평화의 예물을 드리오니 이 제사를 인자로이 받아들이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9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복된 베르나르도를 기리며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이 성사의 힘으로 그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강생하신 말씀을 열렬히 사랑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포도밭 일꾼을 사려고 집을 나선 밭 주인의 이야기에 빗대고 있습니다(마태 20,1 참조). 그리고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20,16)라는 복음 마지막 절은 덧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비슷한 말씀이 19장 30절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비유에서는 포도밭 주인이 맨 나중에 온 일꾼들부터 맨 먼저 온 일꾼들까지 차례로 품삯을 주는데, 중요한 것은 모든 일꾼이 같은 액수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당시 마태오 복음사가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구체적 상황을 고려해 봅니다. 나중에 신앙을 받아들인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그들보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긴장 관계가 이 비유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께 같은 금액의 품삯, 곧 하늘 나라를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한편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20,13)에서 “친구여”로 옮겨진 그리스 말은 가까운 벗이나 상대방을 점잖게 부를 때 쓰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에는 이 호칭이 세 번 나오는데, 모두 처신을 잘못한 사람, 곧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지만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과(22,12 참조), 스승을 배신할 유다를(26,50 참조) 부르시는 대목에 쓰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 “친구여”라는 부름은 묵상 거리를 줍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워 다른 이에게 시기와 질투를 드러내지는 않나요?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우리는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하고 있나요? 혹시 유다처럼 나의 명예나 이익만을 찾으며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지는 않나요?
(김상우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