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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생활

Catholic Life

매일미사
[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입당송
시편 105(104),3-4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8,12-17
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8(67),2와 4.6-7ㄱㄴ.20-21(◎ 21ㄱㄴ)
◎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 하느님이 일어나시니, 그분의 적들은 흩어지고, 원수들은 그 앞에서 도망치네. 의인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리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
○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
○ 주님은 날마다 찬미받으소서. 우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은 우리 구원이시다.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 주 하느님께 있네. ◎
  복음 환호송
요한 17,1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뭣이 중헌디?’ 10여 년 전에 개봉한 한 영화의 대사다.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음에도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모습을 비판하는 이 대사는, 아역 배우의 강렬한 연기가 더해져 당시 우리 사회의 유행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의 “위선자들아”라는 말씀도 이 대사와 통하지 않을까. 사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불만을 표했던 회당장 또한, 치유라는 행위 그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공감의 깊이였다. 그는 질병이라고 하는 인류 보편적 고민거리 앞에서 다소의 말조심을 할 줄은 알았지만, 그 고민을 직접 겪는 이들의 구체적인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진 못했다. 무엇이 본질적인지 성찰하지 못하고 굳어진 규칙과 규범은, 이해를 가로막는 내면의 장벽이 되어 이런 말로 이어졌다. ‘다른 날 와서 치료받으면 되잖아? 그걸 못 참아?’
무엇이 우선인지, 하느님께서 더 무겁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고통의 맥락을 외면하고 내 알량한 고집으로 합리화하며 살아간다면, 그건 편한 삶일 수는 있어도 진실한 삶, 넓고 바르게 보는 삶은 아닐 터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주님의 해방을 청해야 하지 않을까. 불의와 병고로부터 해방되는 것과 더불어 굳어 버린 내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이룰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말로 서로를 위해 ‘중헌 것’을 식별하고 또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예물 기도
주님, 주님께 올리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고 저희가 바치는 제사가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0(19),6 참조
당신의 구원에 우리가 환호하며,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을 높이리이다.

<또는>

에페 5,2 참조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네.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놓으시어, 하느님께 향기로운 예물로 바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부제품을 받기 직전이었습니다. 손목 관절의 뼈들이 으스러졌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생살을 째고 뼈를 끄집어낸 다음, 그 뼈에 철심을 박아 다시 집어넣었으니 안 아플 리가 없습니다. 밤새도록 끙끙대다가 겨우 눈을 잠깐 붙였다가도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온몸에 고통이 들이닥쳤기 때문입니다.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를 하다가도 어디까지 하였는지 잊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나오는 기도는 ‘제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손목에 있는 흉터를 보면 그때가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나옵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습니다. 상상해 보니 몹시 괴롭고 불편할 듯한 모습입니다. 이 여자가 바란 것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제가 수술 뒤에 통증이 빨리 사라지기를 빌었던 것처럼, 자기가 겪는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 여자에게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 모습을 본 회당장이 분개하며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자기 아들이나 딸이었다면, 또는 자기 자신이었다면 그렇게 말하였을까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13,15)라고 하십니다. 자기들은 안식일을 제멋대로 지키면서 다른 이에게는 너그럽지 못하고 매몰차게 구는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늘 ‘다른 이’와 ‘나’를 나누어 생각합니다. 다른 이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럽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엄격하고 다른 이에게 너그러운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찬우 다두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