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복음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뭣이 중헌디?’ 10여 년 전에 개봉한 한 영화의 대사다.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음에도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모습을 비판하는 이 대사는, 아역 배우의 강렬한 연기가 더해져 당시 우리 사회의 유행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의 “위선자들아”라는 말씀도 이 대사와 통하지 않을까. 사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불만을 표했던 회당장 또한, 치유라는 행위 그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공감의 깊이였다. 그는 질병이라고 하는 인류 보편적 고민거리 앞에서 다소의 말조심을 할 줄은 알았지만, 그 고민을 직접 겪는 이들의 구체적인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진 못했다. 무엇이 본질적인지 성찰하지 못하고 굳어진 규칙과 규범은, 이해를 가로막는 내면의 장벽이 되어 이런 말로 이어졌다. ‘다른 날 와서 치료받으면 되잖아? 그걸 못 참아?’
무엇이 우선인지, 하느님께서 더 무겁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고통의 맥락을 외면하고 내 알량한 고집으로 합리화하며 살아간다면, 그건 편한 삶일 수는 있어도 진실한 삶, 넓고 바르게 보는 삶은 아닐 터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주님의 해방을 청해야 하지 않을까. 불의와 병고로부터 해방되는 것과 더불어 굳어 버린 내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이룰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말로 서로를 위해 ‘중헌 것’을 식별하고 또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