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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생활

Catholic Life

매일미사
[녹]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입당송
시편 105(104),3-4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9,1-5
형제 여러분,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2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5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7(146─147),12-13.14-15.19-20ㄱㄴ(◎ 12ㄱ)
◎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시온아, 네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은 네 성문의 빗장을 튼튼하게 하시고, 네 안에 사는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
○ 주님은 네 강토에 평화를 주시고,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당신 말씀 세상에 보내시니, 그 말씀 빠르게도 달려가네. ◎
○ 주님은 당신 말씀 야곱에게, 규칙과 계명 이스라엘에게 알리신다. 어느 민족에게 이같이 하셨던가? 그들은 계명을 알지 못하네. ◎
  복음 환호송
요한 10,2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6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2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4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5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6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율법과 죄의 관계(7장)를 밝힙니다. 사도는 정직한 자기 고백을 통해, 율법의 이면에 죄가 있음을, 율법 없이는 죄도 없음을 지적합니다. 사도의 깊은 성찰 이면에 로마의 격언이 하나 비칩니다.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형벌도 없다.(Nullum crimen, nulla poena sine lege)” 물론 법학적 관점에서 저 말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만, 사도는 다른 관점에서 율법의 가치를 논했습니다. 이 사안은 사도에게는 내적 고백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외적 투쟁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때도,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잣대로 가부를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그 자체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안식일 규정으로 예수님의 일을 판단하는 순간, 그 일은 좋은 일이 아니라 합당하지 않은 일이 되고야 맙니다. 범죄를 막기 위해 규칙을 만들지만, 규칙이 만드는 죄도 있습니다. 죄가 생긴 자리에, 기쁨은 없습니다. 율법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만이 절대 기준이 된 세상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슬프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에 바리사이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수종 환자를 고치셨다. 그 집의 주인과 초대받은 이가 모두 함께 기뻐하며, 그를 끌어안고 함께 잔치를 벌였다.’ 이런 이야기였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합당하냐?’ 하시던 질문도, ‘얼마나 좋으냐’로 바뀌지 않았을까요.
  예물 기도
주님, 주님께 올리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고 저희가 바치는 제사가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0(19),6 참조
당신의 구원에 우리가 환호하며,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을 높이리이다.

<또는>

에페 5,2 참조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네.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놓으시어, 하느님께 향기로운 예물로 바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얼마 전 교리 교사 한 명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칠 자격이 있을까요?” 신앙에 대한 확신도 없는데, 주일 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냐는 물음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예전에 제가 교리 교사를 할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 보좌 신부님에게 저도 정말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기가 너무나 힘들어요.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저도 잘 모르는데!”
그때 신부님이 요한 1서 4장의 내용을 들려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형제를, 자매를, 주일 학교 학생을,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구절에 얽매이는 모습을 봅니다. 이들은 사랑보다는 규정을 지키려고 합니다. 안식일의 본뜻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였다면 사람들도 사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어두운 일반 백성들을 ‘땅의 백성’(암 하아레츠)이라고 낮추어 보았습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을 사랑하는 데 쓰지 않고, 잘난 체하는 데 쓴 것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되물어 봅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바리사이들처럼 자신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재고, 사랑을 줄 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 대하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이찬우 다두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