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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생활

Catholic Life

매일미사
[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입당송
시편 88(87),3 참조
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7,22ㄴ―8,1
22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23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24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
25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26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27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2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29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30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8,1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89.90.91.130.135.175(◎ 89ㄱ)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원하시옵니다.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원하시고, 하늘에 든든히 세워졌나이다. ◎
○ 당신의 진실 대대로 이어지고, 당신이 세우신 땅 굳게 서 있나이다. ◎
○ 당신 법규대로 오늘까지 서 있나이다. 만물이 당신을 섬기나이다. ◎
○ 당신 말씀 밝히시면 그 빛으로, 미련한 이들이 깨치나이다. ◎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
○ 이 목숨 살려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당신 법규로 저를 도와주소서. ◎
  복음 환호송
요한 15,5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있다는 말씀엔 번역과 해석의 논란이 있습니다. ‘가운데’로 번역한 ‘엔토스’는 ‘~안에’, ‘~함께’라는 뜻을 지니는데,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미 왔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갔다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읽으면 어떨까요? 하느님 나라가 여기, 혹은 저기 있다라고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듣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규정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예수님 덕택에 이미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살아가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가 이승우는 『사랑의 생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살지 않는 이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고요.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간다면, 하느님 나라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 그 자체라서 더 이상의 물음은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예물 기도
주님,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 신비를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1-2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또는>

루카 24,35 참조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성체로 힘을 얻고 감사하며 자비를 바라오니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성령의 힘으로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의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시간을 물었더니, 시간이 아닌 장소를 말씀하신 셈입니다. 시간을 말씀하시지 않은 까닭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무 때나 어디서나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공생활을 관상하는 묵주 기도의 빛의 신비 3단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 맨 처음부터 줄곧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분 공생활의 첫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였습니다. 특히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읽으신 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당신의 인격과 활동에 일치시키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자기의 선함으로 얻어 내야 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 어디인지를 묻기보다 그 나라를 반갑게 맞아들이면서 그 나라에서 환영받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