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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생활

Catholic Life

매일미사
[녹]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입당송
시편 88(87),3 참조
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세상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13,1-9
1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2 오히려 불이나 바람이나 빠른 공기, 별들의 무리나 거친 물,
하늘의 빛물체들을 세상을 통치하는 신들로 여겼다.
3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4 또 그것들의 힘과 작용에 감탄하였다면 바로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만드신 분께서 얼마나 힘이 세신지 알아야 한다.
5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
6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7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8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9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2-3.4-5ㄱㄴ(◎ 2ㄱ)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환호송
루카 21,28 참조
◎ 알렐루야.
○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 알렐루야.
  복음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몇 해 전, 매일 같이 오가던 배가 기울고, 무심히 찾은 밤거리가 아수라장이 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재난은 언제나 익숙한 공간에서 벌어지더군요. 애초에 공간이 위험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익숙함 때문에 일상이 비틀어진 것일까요. 일상과 파국은 어울리지 않으나, 사실은 맞닿아 있습니다. 영원히 무탈할 것만 같았던 일상이 붕괴될 때 파국은 도래합니다.
파국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짓는’ 곳에서 벌어져 왔습니다. 파국이 일상을 찾아왔을 때, 일상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거나 일상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은 실낱같은 가능성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앞선 파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 걸까요.
파국의 날에 결말이 드러날 뿐이라면, 애초에 파국은 일상에 내재된 것인가요. 파국을 준비하거나 연습할 수도 있는 걸까요.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준비된 파국은 새로운 일상으로 건너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부활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예물 기도
주님,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 신비를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1-2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또는>

루카 24,35 참조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성체로 힘을 얻고 감사하며 자비를 바라오니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성령의 힘으로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인 지혜서의 말씀에 마음이 오래도록 머뭅니다. “자연 숭배의 어리석음”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힘에 압도되어 그것들을 신으로 받들어 섬기는 일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는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자연 안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즐기면서도, 그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찾지도 알아채지도 못하는 무지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가끔 ‘창조론을 믿느냐 진화론을 믿느냐?’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진화의 법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저와 세상의 온갖 것들을 그저 우연의 산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화의 법칙과, 그 우연의 뒤에 자리한 숨겨진 섭리와 질서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존 철학에서 말하듯 저 자신을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그래서 냉혹한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고독한 삶을 살아 내야 하는 숨 가쁜 존재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선배 신부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유, 우리 하느님은 참 재미있으신 분이야. 하느님은 엄청 심심하셨나 봐. 요렇게도 만드시고 조렇게도 만드시고 …….”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참 재미나신 하느님께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시며 세상의 온갖 것을, 그리고 저를 비롯한 우리를 모두 소중하게 만드셨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의 아름다움이 마음 깊숙이 다가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김동희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