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입당송
보라, 주님이 영화롭게 내려오시리라.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리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다시 오실 외아드님을 깨어 기다리오니 구세주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저희가 등불을 밝혀 들고 깨어 있다가 그분을 맞이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2.3.4와 6(◎ 요한 8,12 참조)
◎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오시니 마중 나가자. 주님은 평화의 임금이시다.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삶을 쉽게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언제나 무리 곁에 머물고, 그 무리 속에서 자신을 잊어라.” 니체의 유고에서 읽은 말입니다. 이 말은 무리 짓지 않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역설적으로, 사람은 어떤 집단에 소속감을 느낄 때 안정감을 느낀다는 점을 인정하는 말도 되겠지요. 하지만 어떤 소속감은 모두에게 안정감을 주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안정감을 주는 강한 소속감은, 공동체 바깥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장벽이나 거부감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무리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자신들의 무리에는 속하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정리하자면, 예수님 역시 어떤 배타적 시선의 희생자였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 제자들도 그런 배척을 받았겠지요.
신앙 역시 교회라는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께 벌어진 일과 예수님의 말씀을 거울삼아 우리를 성찰해야 하겠지요. 우리 신앙을 구성하는 소속감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고 있나요. 반대로 다른 이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전해지는 걸까요. 우리는 우리 바깥의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예물 기도
주님, 비천한 저희가 드리는 기도와 제물을 굽어보시어 아무런 공덕이 없는 저희를 너그러이 보호하시며 도와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대림 감사송 1 :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필리 3,20-21 참조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바꾸어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에 참여한 저희를 생명의 양식으로 기르시니 저희가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마태 11,16) 기쁘게 놀 줄 모르고 늘 불평하는 아이들과 같은 당신 세대를 꾸짖으십니다.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모든 유다의 지도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위한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열린 마음으로 들었지만, 권력과 풍요를 누리는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에 열려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보다 더 귀먹은 이는 없고, 보려고 하지 않는 이보다 더 눈먼 이는 없습니다. 회개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개로 초대하는 이들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를 옹호합니다.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거부하고자 그를 ‘마귀 들린 자’라고(11,18 참조) 부르고, 예수님을 거부하고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11,19)라고 일종의 인신공격을 하면서 핵심인 하느님 말씀을 피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말에 불만을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도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불만의 이유나 핑곗거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고 믿는다면, 오늘 독서의 이사야서가 말하는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48,17)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