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마냥 좋으신 분은 아니셨다. 적어도 어린 시절부터 그분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자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반갑기보다 못마땅한 존재였다. ‘못마땅하다’고 번역된 그리스말 동사 ‘스칸달리조’는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을 넘어, ‘돌에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익숙하다고 믿어 온 대상이 갑자기 낯설어질 때, 인간은 그 낯선 것에 질문하기 보다 흔들리는 자신의 판단 기준에 더 집착하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상식’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상식이란 대체로 많은 사람이 수긍하는 판단을 가리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식은 이랬다. 나자렛 같은 시골에서는 위대한 예언자나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는 것.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이웃인지 훤히 아는 사람은, 우리가 허용한 만큼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무언의 규칙이었다. 그 선을 넘어설 때 사람들은 감탄보다 당혹을 느끼고, 그 당혹은 이내 질투 섞인 거부로 바뀐다. 가장 잘 안다고 여기는 대상에게 우리가 가장 손쉬운 판단을 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익숙함은 이해로 가장하지만, 때로는 가능성을 가두는 옹졸함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