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입당송
시편 25(24),16.18 참조
주님,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하느님,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본기도
하느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을 섭리하시니 저희에게 해로운 것은 모두 물리치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2,8-15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15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5(24),4-5ㄱㄴ.8-9.10과 14(◎ 4ㄱ)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소서.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 주님의 계약과 법규를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모든 길은 자애와 진실이라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와 사귀시고, 당신의 계약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대략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되뇌이면, 그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사람을 사랑하듯이 애틋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기리면, 그것이 하느님 사랑일까요? 모두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물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흐릿한 대답뿐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다.”(『마커스 보그의 고백』 11장)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대답이 완전한 답은 아니겠지만, 꽤 선명한 대답 같습니다. 자신 안에만 갇혀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뜻이겠지요. 나만 바라보던 폐쇄적인 삶에서 벗어나, 모든 이를 낮은 곳에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가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예물 기도
주님,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거룩한 제대에 제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를 씻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드리는 이 성찬의 제사로 더욱 깨끗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7(16),6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또는>
마르 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를 성자의 살과 피로 기르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다스리시어 저희가 말보다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마침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이 사람은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 사두가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적대감을 가지는 대신 존중하며 경청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모습을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마르 12,28)라고 묘사합니다. “듣고”, “보고”, “다가와”라는 동사를 잇따라 쓰며, 한 인간이 진리 앞에서 천천히 마음을 여는 장면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라삐들이 613개의 계명을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으로 나누어 논쟁하던 시대, 그는 율법 전체를 떠받치는 중심을 묻습니다. 무엇을 붙들어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지, 무엇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계명만으로 답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신명기 6장 4절의 고백을 꺼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라면, 사랑도 둘로 갈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 인간의 온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삶의 방향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 삶 전체를 돌려놓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가져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2,31).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인간을 향한 책임으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결국 형제적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이에 율법 학자는 더 나아가 이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12,33)라고 고백하며, 성전의 제도보다 더 깊고 넓은 곳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짚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12,34). 아직 문턱이지만, 이미 빛은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사랑은 그 빛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제도와 그 제도가 만들어 놓은 숱한 형식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율법은 제도와 사상과 규범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완성을 이루어 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