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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미사] 김종수 주교 강론
   2021/08/25  10:58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미사 강론


2021년 8월 21일(토) 10시 30분, 대전교구 솔뫼성지 기억과 희망 성당

 

대전교구장 서리 김종수 주교

 

찬미 예수님!
이 미사, 크게는 우리 주교회의에서 기획은 했지만 그래도 대전교구에서 책임지고 잘 준비한 행사인데, 우리 추기경님과 의장 주교님 여러 주교님들, 우리 아빠스님도 함께해 주셔서 아주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첫 사제이시고 유네스코가 2021년 세계의 인물로 선정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사셨던 조선 후기 사회, 특히 18세기에 들어서서 조선은 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사회 질서가 근본적으로 뒤흔들리는 그러한 격동의 시기를 맞았습니다. 여러 갈래의 실학자들은 새롭게 건설될 사회의 모습을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그 핵심은 신분의 해체였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서양 역사의 시민 혁명과 비슷한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1777년 겨울 권철신, 정약종, 이벽 등이 모여 이른바 주어사 강학을 개최한 것은 단순히 서양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나 종교적인 관심이 아니라 조선 사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심도 깊은 모색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는 모든 사람의 형제애라는 천주교 교리는 바로 이들에게 조선 사회의 신분 해체의 방향에 빛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후 여러 학자들이 주어사 천진암에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열띤 토론을 벌여가면서 서서히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조선 사회의 변혁을 모색하던 이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조선 천주교 신앙 공동체는 처음부터 신분을 초월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가성직 제도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던, 비록 교리를 잘못 이해하여 시행한 것이긴 하지만, 사제의 필요성에 자체적으로 임명했던 열 명의 그 신부 중에 중인 출신도 농부 출신의 평민도 그렇게 그 안에 포함돼 있던 것이, 이들이 애초부터 새로운 사회, 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조선 사회가 그렇게 원했던 신분 질서의 해체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회 변혁의 분위기를 몸으로 느끼는 평민과 천민들에게 이러한 천주교 교리는 마치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해방 역사와 같은 희망이 보였던 것입니다.

 

1801년의 홍주 순교자 황일광 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신분에 맞지 않게 너무나 과분한 대우를 해주는 이 땅에 있고, 또 하나는 후세에 있습니다. 이 백정 출신 황일광 시몬이 다른 신분에 감히 얼굴을 들고 쳐다볼 수도 없는 다른 신분의 신자들과 동등하게 대해주는 신자 공동체 안에서 이미 하느님 안에서의 천국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1801년 신유박해의 수모는 일반 양민과 천민들 그리고 여성들이 빛을 발견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802년에서 1846년에 전국 기록을 보면 신유박해 직후에 상민 천민 출신 신자들이 74.1%였고 양반 중인 출신 신자들이 25.9% 그리고 여성 신자들의 비율이 36.1%로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조선의 천주교가 이런 흐름 속에 있던 1821년 8월 21일―바로 오늘입니다―이곳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이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동등한 자녀라는 이른바 만민평등 사상을 갖고 성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836년 모방 신부님은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했습니다. 그들은 1836년 12월 3일 서울을 출발해서 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으나 민란과 아편 전쟁의 혼란 속에서 마카오와 마닐라를 오가며 육체적으로 지극히 힘든 여정 속에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생일을 일일이 돌아보지 않아도 수천리길을 걸어다니며 엄격한 기도 생활과 훌륭한 수준의 신학 공부를 해낸 것은―물론 이 신학생들을 선발한 선교사들이 증언하듯이 개인적인 역량도 물론 있었겠죠, 그러나―근본적으로 당시 조선이 신학생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얼마나 혼신의 힘을 쏟아 충실히 따라갔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더구나 김대건 안드레아는 부제품을 받기 전부터 박해가 극심했던 조선으로 들어오는 길을 찾고 또 여러 번 시도합니다. 여기에서 사제품에 대한 그의 의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수천 리 길을 걸으며 중국 땅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사제 성소의 길을 걸었으니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귀국하여 사제로서 조선 교회를 위해 충실히 봉사하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계획이나 소망을 갖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박해 속에 자신의 부친과 최양업 토마스의 부모를 포함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고 있던 조선 교회 안에 함께하는 것이 첫째이고, 그 과정에서 사제로 서품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그 시간부터 사제로 봉사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바로 오늘 이 시각 고국 조선 교회의 수난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입국 시도 실패가 있었지만 페레올 주교님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 성당에서 김대건 부제에게 사제 서품을 주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님은 페레올 주교님과 답 신문님과 함께 라파엘호에 몸을 싣고 8월 3일 상해를 출발하여 많은 고생, 어려운 시간을 고난을 지나 10월 12일 강경 부근 황산포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귀국한 지 약 11개월 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이렇게 조선 후기 사회 변화를 어려서부터 보고 자랐고 사제 성소를 받고 험난한 시간 속에서 사제 수업을 했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겪고 있는 고국의 신자들과 함께 있기를 그렇게 소망했던 김대건 신부님은 만 25살의 젊은 나이, 사제가 된 지 약 1년 만에 기꺼이 순교의 영광을 입으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마지막으로 응답하면서도 신자들에게 보낸 마지막 서한에 신부님은 “사랑의 입맞춤을 하노니 천국에서 만납시다.”라는 인사를 보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서는 짧게 그러나 이런 목자로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착한 목자로 남아 우리 조선 교회 신자들의 영적 목자로 사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이렇게 잠시 돌아보면서 저절로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례적으로 공적인 공경을 표하지는 않지만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태어나 함께 험난한 유학길을 걷고 사제가 되어 수십 년 조선 땅 골짜기 골짜기 신자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다 길 위에 쓰러져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도 함께 기억합니다.
 
사제로서의 삶이 아주 대조적인, 그러나 오로지 하느님과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친, 참으로 많이 닮은 위대한 두 사제를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사제의 삶의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두 신부님께서 영적인 굳건한 기둥으로 우리의 마음 안에 남아 있기를 기도합니다.

 

https://youtu.be/7hPORczeA3o 미사 실황 중계 영상에서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