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가톨릭신문사 직원연수 파견미사 강론) |
2022/11/25 11:33 |
가톨릭신문사 직원연수 파견미사
2022. 11. 24. 꾸르실료교육관
오늘 읽은 제1독서인 사도행전 20,28-38은 바오로 사도께서 ‘3차 선교여행’ 중에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하신 훈화 중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이 훈화는 에페소에서 한 것이 아니라 에페소 근처에 있는 항구도시 밀레토스에서 했던 훈화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낼 생각으로 시간이 없어서 에페소로 사람을 보내어 교회 원로들을 밀레토스로 불러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훈화를 마치자 모두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 사도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훈화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2-24)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에 투옥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입니다. 결국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소를 하였고, 그 항소가 받아들여져서 황제의 법정에 서기 위해 로마로 압송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던 배가 난파를 당하여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난 뒤 몰타를 거쳐 로마에 도착하여 비교적 자유롭게 선교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하면서 사도행전은 막을 내립니다.
바오로 사도를 볼 때 사명을 띤 한 사람의 역할,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토인비는 바오로 사도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왔던 그 사건이 세계사를 바꾸어 놓았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더 나아가 언론인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그 사명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의 원로들’이라고 하는 것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 간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원로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라.’고 하면서 ‘늘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우리들에게 ‘깨어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3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 주 가톨릭신문 일요한담 칼럼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뉴스가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 뉴스를 만든다.” 칼럼을 쓴 분이 어떤 책에 나온 것을 인용한 글이지만 일리 있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론을 ‘제4의 권력’이라고 합니다. 입법, 사법, 행정 다음의 권력이라는 것이지요. 모든 권력과 권위에는 칼과 같이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력과 권위를 사용하는 사람의 욕심과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역기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시민사회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등 온라인 수단들이 소통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갈등과 혐오를 조장하거나 확장하는 역할도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이념갈등은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사라질 기미가 없고, 이제는 이념갈등뿐만 아니라 세대갈등, 젠더갈등, 종교 갈등까지 있어서 사회가 참으로 혼란스럽고 엄청난 경제적, 정신적 손해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런 갈등들이 SNS나 미디어를 통하여 생산되기도 하고 조장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된 언론으로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요한 17,11-19)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기도를 하십니다. 여기에 두 가지 지향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1)
하나가 된다는 것, 정말 쉽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양보하고 내놓지 않으면 하나가 되기 어렵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둘째 지향은,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17)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참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검찰에 소환되면서 남긴 말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曾子殺人’과 ‘三人成虎’라는 故事成語입니다. 이 말들은 사실이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지만 그것이 맹점이 되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수백 명의 배심원들이 유죄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사형이 되었던 것입니다. 히틀러는 누가 뽑았습니까? 독일 국민들이 나치당을 선택했고 나치당의 당수였던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총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수가 반드시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법원에서 낙태권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편의와 이기심에 편승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살아야 합니다. 가톨릭 언론의 사명은 진리를 전하는 것이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 사람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