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말씀과 성령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제18차 소공동체 전국모임 파견미사 강론) |
2019/07/05 11:40 |
제18차 소공동체 전국모임 파견미사
2019. 07. 03(수) 대구가톨릭대학교
2박3일간 소공동체 전국 모임이 있었는데 다들 편안하셨습니까? 이 행사를 우리 교구 지역에서 하는 바람에 제가 본의 아니게 파견미사를 주례하고 강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의 요청으로 경기도 아론의 집에서 소공동체 전국모임에서 미사를 주례한 바가 있고, 또 교구 소공동체대회에서도 여러 번 미사를 주례하였습니다만, 그 때마다 강론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 의하면, 소공동체가 이상과 원리에 있어서는 새로운 복음화의 방법으로 참으로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실제 현실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어려움이 있고 부딪힘이 분명 있기 때문이며, 또한 제 자신이 이러 저러한 이유로 소공동체에 깊이 몰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공동체를 열심히 하고 계시는 몇몇 신부님들로부터 제가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1997년부터 98년까지 있었던 우리 교구 제1차 시노드에서 소공동체운동을 활성화하자고 했는데 현 교구장은 너무 소극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교구의 몇몇 본당의 무리한 소공동체 추진으로 많은 평신도 신심단체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아야 했고 안타깝게도 본당이 분열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최근에 중남미에서 시작한 SINE 프로그램이 인천교구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우리 교구도 재작년부터 몇 차례 신부님들을 대상으로 SINE프로그램을 실시하였습니다. 저도 1차 케리그마 피정을 재작년에 참여하였고 지난 달에는 2차 프로그램인 코이노니아 피정에 참여하였습니다. SINE 프로그램도 자신의 신앙을 쇄신하고 본당을 말씀과 친교의 공동체로 만드는 데 있어서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소공동체든, SINE든 중요한 것은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께서 함께 하여 개인과 공동체가 말씀과 성령으로 성화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교구장이 된 후 2011년 교구 100주년이 되었을 때 교구 제2차 시노드를 개최하였습니다. 제2차 교구시노드를 준비하면서 본당상과 소공동체를 다시 주요 의제로 다루고자 하였으나 소공동체에 대한 찬반의 의견들이 너무나 첨예하게 대립되는 바람에 의제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대신 ‘청소년’과 ‘가정’, 그리고 ‘선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배려’가 의제로 선정되어 다루어졌습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몇몇 교구에서 시노드를 실시하였고 보편교회도 최근에 주교 시노드를 여러 번 개최하였습니다만, 지난 세기에 있었던 가장 큰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공의회가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 그 공의회 정신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한 마디로 특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였고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60년대부터 많은 평신도 사도직 운동들이 생겨났고 그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한국천주교회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교회 창립 초기부터 평신도들의 활동이 대단하였습니다.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나서서 스스로 배워서 세례를 받고 또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는 목숨을 담보해야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때였는데, 우리 선조들의 그런 적극성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예부터 내려오는 한국 평신도들의 이런 적극성과 활동성 때문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1911년 4월 8일부로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할 설정되었는데, 당시 대구대목구(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충청북도)는 본당이 18개였고 신부님도 20명뿐이었습니다. 대신 공소는 390개가량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소회장이나 또는 전교회장이 공소 공동체 일을 맡아 했습니다. 단지 공소를 관리할 뿐만 아니라 주일 날 공소예절을 주도하고 전교를 하며 교리를 가르치는 일 등이 모두 공소회장이나 전교회장의 몫이었습니다.
우리 교구 초대 교구장이신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은 이러한 회장 직분의 중요성과 그 직무를 가르치기 위하여 1913년에 회장들을 위한 첫 피정을 실시하시고 ‘회장의 본분’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그 책에 주교님의 서문이 실려 있는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사제뿐만 아니라 사제품을 받지 않은 교우 중 특별한 사람들을 협력자로 두셨으니 그 사람들이 바로 회장들이다.”
이 말은 평신도 회장들도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구원사업의 협력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을 오늘날 신부님들이 더 새롭게 가져야 되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렀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져 교구와 본당의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사목에 있어서 변하지 않게 중요한 것은 신부님들의 평신도들과 함께 하는 협력사목의 자세, 열린 사목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들이 열심히 사목하시는 것은 좋지만 자기 혼자서 다 하려고 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오늘날 어느 교구든 신자들 설문조사를 해보면 가장 시급하게 시정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가장 많이 차지하는 대답이 성직자들의 독단적인 사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이미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지적하셨습니다만, 기회 있을 때마다 성직자들의 성직주의와 교회의 세속주의에 대하여 비판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목 잘 하시는 신부님은 어떤 사람인가하면, 자신도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본당 일을 늘 신자들과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고 더 나아가서 신자들로 하여금 본당 안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열어주고 밀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목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소공동체 정신이라 생각됩니다.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세상 복음화’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한 그 말씀을 살게 함으로써 그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이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인도까지 가서 선교를 하시다가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이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소공동체는 세상 복음화라는 교회의 목적 달성을 위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사람들은 가장 이상적인 본당 공동체는 ‘소공동체들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공동체가 살아야 본당공동체가 산다고 합니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기존의 평신도 신심단체나 액션단체들을 인정하고 포용하면서 그들도 말씀과 성령으로 살아가는 소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여튼 교회가 이 세상의 구원의 표지로서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교회가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서 공동체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본당공동체이든, 소공동체이든, 가정공동체이든 기존의 평신도 단체든 공동체가 공동체답기 위해서는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와 나눔이 있어야 하고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공동체답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기쁘게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 제10항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선포자는 장례식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보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의 열정을 되찾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할 때에도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을’ 되찾고, 이를 더욱 키우도록 합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교황님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교황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묵상하겠습니다.
“때로는 불안 속에서, 때로는 희망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현대 세계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낙심하고 낙담하며 성급하고 불안해하는 선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을 먼저 받아들여 열성으로 빛나는 삶을 살려는 복음의 봉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현대의 복음 선교 80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