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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티교우촌과 순교자들 (주교 영성 모임 미사 강론)
   2022/09/22  9:47

주교 영성 모임

 

2022. 09. 20.(화) 한티순교성지

 

한티순교성지에서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하게 되면 한티성지와 순교자들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팔공산 중턱 한티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모여 살았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1815년에 일어났던 을해박해 때부터가 아니었는가하고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경상도 북부 지방 산골짜기에는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 박해를 피해 와서 모여 살던 교우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1815년 을해년 어느 봄날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수많은 교우들이 붙잡혀서 당시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로 끌려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옥에 갇힌 교우들을 옥바라지하거나 자주 찾아보기 위해 그 가족들이 이곳 한티에 모여 살기 시작함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티 교우촌은 어쩌면 대구교구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 한티도 박해의 피바람을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1868년 무진년 어느 여름날 포졸들이 마을을 급습하였고, 이리 저리 흩어지는 교우들을 쫓아가 그 자리에서 죽였던 것입니다.

한티에는 37기의 순교자 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상돈 아오스딩 회장님이 청년 시절 1867년 1월에 상주에서 순교하신 삼촌을 이곳 한티에 모시고 와서 묻었던 하느님의 종 서태순 베드로, 그리고 한티 공소회장 조영학 토마의 부친 조가롤로와 모친 최바르바라, 그리고 조 가롤로의 누이 조아기만 이름을 알 뿐, 나머지는 이름조차 모르는 무명 순교자 묘입니다. 그것도 7기는 한티재를 거처 군위군 부계로 넘어가는 지방도로 너머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988년 5월에 도로 개설로 인해 분묘 이장을 할 때 저도 교구 사제평의회 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배석했었습니다. 당시 동영상 자료가 남아있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 동영상을 만들었는데, 오늘 회의 전 묵상 시간에 잠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티의 순교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심문도, 재판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 분들입니다. 집에서, 혹은 밭이나 가마터에서 일하다가, 혹은 도망을 가다가 붙잡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고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해시대의 교우촌들이 다 그럴 것입니다만, 불편하기 짝이 없고, 구차하기 그지없는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교우촌을 떠나지 않고 모여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은, 언젠가 때가 오면 순교를 하겠다는 각오로 살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실 때가 닥치면 쉽지 않은 것이 순교일 것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의 작은 할아버지인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는 박해를 피해 경상도 영양 일월산 기슭 우련전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살다가 1815년 을해년 봄에 체포되어 대구에 있는 경상감영 옥에 갇히게 됩니다.

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동안에 형에게 보내는 편지 2통과, 교우 이씨와 유씨에게 아내를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 1통이 남아있습니다. 형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도합 100여 명이 붙잡혔었습니다. 이 중에는 도중에 굶주려 죽은 이들도 있고, 마음이 약하여 배교한 사람들도 있어 이제는 겨우 13명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천주의 섭리가 명하신 것이며, 또 우리들이 감사를 올려야 할 은혜입니다. 이래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더 슬퍼지기만 합니다. 저 같은 불쌍한 죄인은 순교의 영광을 누릴 만한 공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다만 여러 교우들의 도우심만 믿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빌고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제 원이 채워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이 편지에 의하면 처음에 붙잡힌 사람이 100여 명이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남은 사람이 겨우 13명이 된다고 하니 그 동안에 떠난 사람의 상당수가 배교하지 않았겠는가 생각됩니다.

형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는 사형 집행이 자꾸 늦어지니까 초조해 하면서도 이 순교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전심전력으로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드디어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는 임금으로부터 사형집행 명이 떨어져 동료 6분과 함께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치명하였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먼저 옥사한 4분과 함께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서 복자로 선포되셨습니다.

그렇게 순교를 열망하면서 참고 기다리며 이겨낸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를 생각하면,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 제1독서에서 하신 말씀, 즉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는 말씀이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성월에 한국 순교자들을 생각하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삶인지, 그리고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 어떤 삶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과 한티의 순교자들이여, 믿음이 약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