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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움의 기쁨 (신학교 입학미사 강론)
   2023/03/02  16:57

신학교 입학미사

 

2023. 03. 0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오늘 우리 신학교에 입학하신 모든 학생들에게 축하를 드리며 환영합니다.

오늘은 3.1절 만세운동 기념일입니다. 104년 전에 우리 신학교의 선배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 신학교가 늘 이 날 입학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언제부터인가 이 날 입학미사를 하여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이 날 하지 못했고, 지난해부터 다시 이 날 입학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오늘은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가 완전히 해소되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신입생들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많은 신자 분들로 성당을 가득 채워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어제 독서직을 받은 신학생들과 시종직을 받은 신학생들에게도 축하를 드리며 주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강복하시고 좋은 길로 이끌어주시길 빕니다.

 

논어의 첫 문장이 무엇입니까?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입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 한가!’라는 뜻입니다. 배움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자님의 말씀대로 지식을 하나 하나 얻어가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하느님의 진리를 하나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이 신학교에서 다들 체험하면 좋겠습니다.

교육이나 양성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수님들이 가르치는 사람이며, 학생들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각자 자신의 역할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수님들은 잘 가르치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며, 학생들은 잘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보고 듣고 익혀야 할 것입니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學習’이라고 하는데, 단순히 어떤 지식만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만이 아니라 몸가짐과 마음가짐, 말투와 행동거지 등 올바른 인격과 생활 전체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德은 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덕을 닦은 것은 좋은 습관을 쌓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이곳 신학교에서 좋은 습관을 쌓음으로써 덕을 닦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교수님들에게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선배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고, 또 동료들에게도 배울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면서도 배울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말에 외출을 하거나 본당에서 사목실습을 하면서도 배울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여름과 겨울에 방학을 합니다. 올해 대구교구 신입생들은 12주 동안 매주 금요일에 성소국장 신부님과 함께 신학교 입학 前 과정 프로그램을 하였던 것으로 압니다만, 방학이란 것이 그냥 쉬고 노는 기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放學이라고 할 때 ‘방’자를 ‘놓은 放’을 쓰는데, 배우는 것을 그만둔다는 뜻이 아니라, 放牧이라는 말과 같이 ‘놓아기르는 것’이며, ‘학교 밖에서 배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학교 밖에서, 가정과 본당에서, 세상 속에서도 배우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말에 개학 피정을 하였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개학을 하겠지만, 개학이든 방학이든 학생들에게는 모든 곳과 모든 것이 배움의 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신학교는 일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배움의 장이 될 것입니다. 좋은 모범이든 나쁜 표양이든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에 대한 분별력과 식별력을 이곳 신학교에서 길러나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1,29-32)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12,39)라고 하셨습니다.

2000년 전이나 오늘날 우리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감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11,29-30)

요나의 표징이 무엇입니까?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12,40)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오늘 제1독서(요나 3,1-10)에 나오는 것처럼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표징만 요구하는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모든 표징 중의 표징은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강생하시고 당신 자신을 다 비우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표징을 오늘날 사람들에게 설명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잘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 신학교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공부와 수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한 말대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하려고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언젠가 바오로 사도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와 성 유스티노께서 우리와 우리 신학교를 위해 전구해 주시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