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재를 지키자 (재의 수요일 미사 강론) |
2024/02/15 15:41 |
재의 수요일 미사
2024. 02. 14. 꾸르실료교육관 경당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 시기 첫날을 ‘재의 수요일’이라 부르는 것은,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이 강론 후에 재를 축복하여 머리에 얹는 예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재를 이마에 바르거나 머리에 올리면서 사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혹은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날을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이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시작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재(齋)를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에 사십 일 동안 재를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시작하시기 전에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재를 지켰습니다. 여기에서 ‘재’는 타다 남은 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중대한 일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마태 6,1-6.16-18)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를 지키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단식과 자선입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맞이하기 전 사십 일을 말합니다. 그 사십 일 동안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통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2월 14일이 무슨 날입니까? 이달 매일미사 책에는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 없음’이라 적혀 있습니다. 올해는 오늘이 재의 수요일이고 재의 수요일이 주일급으로 큰 축일이기 때문에 다른 기념일을 지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오늘을 ‘발렌타인 데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이 원래는 ‘성 발렌티노 순교자 기념일’이기 때문입니다. 성 발렌티노는 3세기 때 로마의 성직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젊은이들의 혼인을 금지시켰는데, 발렌티노 사제가 혼인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혼인 주례를 몰래 서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발각되어, 더구나 그리스도교 신앙이 금지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순교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의 순교일이, 연인들이 카드나 사탕을 주고받는 날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박해시대도 아닌데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국가의 미래, 교회의 미래가 우려스럽습니다. 성 발렌티노 기념일을 맞이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온 나라가 결혼 장려 운동을 펼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뒤늦게 여러 지자체와 국가에서 장려 정책들을 내놓고 있는데, 좀 더 대대적인 지원책이 나와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이 또 다른, 의미 있는 날이기도 한데, 무슨 날입니까?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입니다. 몇 년 전 일간 신문에 이런 글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발렌타인 데이는 알고 기념하면서 어찌하여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은 모르는고!”
작년 가을에 안중근 토마스 의사와 뮈텔 주교님과 빌렘 신부님의 관계에 대한, ‘고백’이라는 뮤지컬을 3일 동안 드망즈홀에서 올린 적이 있습니다. 안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안중근의 수의를 지으면서 불렀던 노래에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께서 지어준 흰옷을 입고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하였습니다. 안 의사께서는 중국 뤼순 형무소에 머물면서 많은 유묵을 남겼는데 순국하기 전 남긴 마지막 유묵이 ‘청초당(靑草塘)’이라는 글입니다.
2019년 10월에 교구 평신도 임원들과 함께 중국 하얼빈과 뤼순을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하얼빈 공원 한가운데 ‘靑草塘’이란 글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 의사께서 죽기 전에 면회 온 동생들에게 부탁하기를 자기 시신을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대한민국이 독립하면 고국으로 가져가 달라고 하였는데, 여태까지 유해도 찾지 못하였고, 청초당이란 비석만 하얼빈 공원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청초당(靑草塘)’이란 말은, 푸를 靑자에 풀 草, 그리고 못 塘자로, 봄이 되면 못가에 푸른 풀이 돋아나듯이 언젠가 조국에도 독립과 해방의 그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과 염원이 담긴 말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이 사순 시기의 마지막은 부활의 파스카가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재를 잘 지키며 살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5,2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