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 말을 들어라.(예레 7,23) (1대리구 3지역 친교의 해 지역방문 미사 강론) |
2024/03/08 17:3 |
1대리구 3지역 친교의 해 지역방문 미사
2024. 03. 07. 동천성당
우리 교구는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10년 장기사목계획에 따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친교의 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교가 작년부터 매월 첫 목요일에 대리구의 한 지역을 방문하여 신부님들과 간담회를 가지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와 성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은 1대리구 3지역 차례로 이곳 동천성당에서 갖게 되었습니다.
미사 전에 신부님들과의 간담회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들 코로나 이후에 본당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친교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에 친교를 이루지 않는 교회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가톨릭교회는 시노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16차 세계 주교 시노드’를 개최하고 있는데, 2021년 10월에 개막하여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세계 주교 시노드의 특이한 점은 본회의를 하기 전에 세계의 모든 본당과 교구와 나라와 대륙에서 시노드 주제에 대한 논의를 미리 가지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래로부터, 즉 모든 백성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종합하여 대의원들이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경청과 식별의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이번 시노드의 또 하나의 달라진 점은 시노드 대의원에 주교님들만이 아니라 남녀 수도회 대표들과 수십 명의 평신도 대표들도 대의원에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시노드의 주제가 ‘시노드적인 교회를 위하여-친교, 참여, 사명’입니다. 시노드의 주제가 시노드인 셈입니다. ‘시노드’란 말은 ‘함께 길을 가는 여정, 즉 함께 길을 간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구가 현재 ‘친교의 해’를 살고 있는데, 지금 진행되는 시노드의 주제와 잘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달 20일에는 범어대성당에서 교구 사제 연수가 있었습니다. 연수 주제가 ‘세대 간의 소통’이었습니다.
한 달 전인가, 얼마 전에 축구 아시안컵 대회가 카타르에서 있었지요? 우리나라가 4강에 올라가서 다들 좋아했는데 막상 시합을 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실망하였는지 모릅니다. 감독의 지도력도 문제였지만 시합 전날 대표팀 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뒤늦게 알고는 더욱 놀랐고 실망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손흥민 선수와 이강인 선수가 아홉 살 차이라고 하는데 그걸 두고 ‘세대 차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말도 일리가 없지 않지만 아무리 세대 차이라 하더라도 큰 시합을 앞두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말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어떤 단체나 공동체가 한마음이 되어 소통을 이루고 일치를 이루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지난 달 사제 연수를 하면서 저도 조별 나누기 모임에 들어가서 신부님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들 동료나 선후배 신부님들과 신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시노드적인 교회가 되고 친교적인 교회가 되지 않고서는 미래에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 모두가 먼저 시노드적이고 친교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우리 공동체가 시노드적인 공동체가 되고 친교적인 공동체가 되도록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시노드’라든가 ‘친교의 해’라든가 하는 것이 한때 논의되었던 하나의 행사로 그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교회의 일상이 되어야 하고, 우리 삶의 일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말을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말을 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서로 다릅니다. 많은 군중은 놀라워하며 감탄하는데,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15)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같은 현상, 같은 사실을 목격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보고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고, 더 나아가 가지고 있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지, 반응들이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정치권에 있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첨예하게 나타납니다. 다음 달에 30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습니다. 벌써 각 당의 후보 선출 때문에 아주 시끄럽습니다. 그리고 정당들이 국민을 위한 정책을 내놓기보다 상대방의 흠집을 내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누군가가 예수님한테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한 말은 네거티브 중의 네거티브이고, 모함 중의 모함일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늘 부정적인 면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러한 반응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17-18)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나라든, 집안이든, 심지어 사탄의 왕국도 분쟁으로 인해 갈라서면 망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의 기적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행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사탄이 자기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자신의 나라를 망하게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난 설 명절에 큰형님 집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난 후, 식사를 하다가 정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형제 사이에 서로 의견이 달라 분위기가 갑자기 냉랭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서 위기를 모면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 이런 분열은 우리나라에 일반화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편견과 선입관을 지적하거나 안타까워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잘 볼 줄 모르고, 잘 듣지도 못합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자고 반성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을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사람이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로 선천적으로 귀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듣지 못하니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예레 7,23-28)를 보면, 예레미야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요점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들어라. 그런데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 7,23.26)
오늘 미사의 화답송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
우리가 친교나 소통을 잘하고자 한다면 먼저 듣기를 잘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들음으로써 친교를 잘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