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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안중근 의사 순국 114주기 추모미사 강론)
   2024/04/02  9:20

안중근 의사 순국 114주기 추모미사

 

2024. 03. 26. 성주간 화요일. 대구가톨릭대학교 성당

 

2010년 3월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품 및 유묵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마침 박물관 관장님이 신자였는데, 저를 찾아와서 순국 당일인 3월 26일에 박물관에서 미사를 드려 줄 수 있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신자들에게 홍보를 하여 그날 대구박물관 강당에 가서 안 의사의 순국 100주년 추모미사를 봉헌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안중근 연구소와 대구지방변호사회의 요청으로 계산성당과 성모당에서 몇 차례 추모미사를 주례하였습니다. 그동안 코로나19 펜데믹도 있었고 해서 한동안 추모미사를 드리지 못하다가 오늘 다시 우리 대학의 안중근 연구소 주최로 안 의사의 114주기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2월 14일이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그날 교구청에 근무하는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과 직원들이 함께 모여 꾸르실료 교육관 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드렸는데, 제가 강론하면서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발렌타인 데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다행스럽게도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신문 칼럼에서 ‘발렌타인 데이는 알면서 어찌하여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은 왜 모르는고?’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안 의사의 거사 일과 순국 일은 아는데 사형선고일까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2019년 10월에 교구 평신도 임원들과 함께 중국에 있는 안중근 의사 유적지를 다녀왔었습니다. 코로나19가 터지기 두세 달 전이었기 때문에 참으로 그때 잘 갔다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10월초였는데, 하얼빈 공항에 내렸을 때 북만주 들판의 차가운 바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사가 치러진 하얼빈역과 안 의사의 전시관을 둘러보고 하얼빈 공원으로 갔습니다. 안 의사가 면회 온 동생들한테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우선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조국이 독립하면 조국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는데 아직 우리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얼빈 공원에는 ‘靑草塘’(청초당)이라는 안 의사의 유묵 글씨를 새긴 비석 하나만 세워져 있었습니다. 청초당(靑草塘)이란 말은 ‘파란 풀이 돋아나는 못 둑’ 혹은 ‘못가에 파란 풀이 돋아난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봄이 되면 못 둑에 파란 풀이 돋아나듯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과 염원을 담은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얼빈에서 뤼순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장춘이란 도시가 있는데, 근방에 있는 ‘소팔가자’라는 교우촌 성당에 잠시 들려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소팔가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마카오를 떠나서 한 2년 반 동안 마지막 공부를 하였던 곳이고,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부제품을 받았던 곳입니다. 안중근 유적지를 둘러보는 여행길에 뜻밖에 그곳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참으로 큰 은혜였고 감동이었습니다. 시간이 없어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뤼순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습니다.

뤼순에는 감옥과 법원이 있습니다. 감옥에는 안 의사가 갇혀있던 독방과 책상이 있었고 교수대와 유묵 전시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좀 떨어진 곳에 당시 법원 건물이 남아있습니다. 그 법원에서 2월 14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항소할 수 있었는데 안 의사는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항소하였다면 좀 더 시간을 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작년 가을인가 범어대성당 드망즈홀에서 ‘고백’이라는 연극이 있었습니다. 안 의사와 뮈텔 주교님과 빌렘 신부님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거기에도 뮤지컬영화 ‘영웅’처럼 안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노래가 나오는데, 역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여러분도 다 아실 것입니다.

드디어 3월 26일 안 의사께서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와 부인이 같이 만들어 보낸 흰 한복을 입고서 2분간 기도를 올리고 당당히 형장으로 걸어가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안 의사께서는 슬하에 1녀 2남을 두었습니다. 안 의사께서 순국하시고 난 뒤, 부인 김아려 아네스께서는 더 이상 조선에서 살 수 없어서 어머님과 자녀들을 데리고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사셨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안 의사께서 사제가 되라고 했던 큰아들 분도를 그곳에서 하늘나라로 보내고 다시 중국 상해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큰딸 안현생께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불문학을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안현생님께서 6.25 한국전쟁 때 자녀들을 데리고 대구로 피난 왔었는데 그 당시 최덕홍 주교님께서 기거할 집을 마련해 주셨다고 합니다. 마침 1952년에 남산동에 설립된 효성여자대학에 교수로 채용되어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불문학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안현생 여사께서는 딸 둘을 두셨는데 황은주씨와 황은실씨입니다. 두 분 다 이제는 돌아가셨습니다만, 생전에 우리 대학의 안중근 연구소를 방문하셨습니다. 이경규 교수님의 소개와 안내로 각각 다른 시기에 대구교구청을 방문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분들을 만나 뵙고 차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안중근 의사님과 그 자녀 분들이 대구와 대구대교구와, 그리고 대구가톨릭대학교와 좋은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께서 우리 한국 근대사와 우리나라 국민에게 끼치고 있는 영향이랄까, 그 의미가 참으로 크다고 생각합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뛰어난 애국자이셨고 교육자이셨으며, ‘동양평화론’을 제창한 평화주의자였고 대단한 문필가였고, 무엇보다도 투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 많은, 그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야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약한 인간인 베드로 사도도 그 엄청난 일을 해내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큰 뜻을 품고 주님께 의탁하면서 부단한 노력을 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Quo Vadis, Domine?” 하고 물었습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 보셨지요? 노벨 문학상을 탄, 시엔키에비치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영화 거의 마지막 부분에 베드로 사도가 신자들의 권유로 박해를 피해 로마를 벗어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새벽 어두운 길을 가고 있는데 저 앞에서 어떤 사람이 가까이 점점 오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까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Quo Vadis, Domine?”하고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로마로 간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 길로 로마로 다시 돌아가서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순교하고 묻힌 바로 그 자리에 오늘날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져 있고 오늘의 이 교회가 서 있는 것입니다.

 

32세라는 짧은 생애를 나라와 하느님을 위해 불같이 살았던 안중근 토마스 의사와 또 다른 수많은 안중근 의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 대한민국이 있고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순국 114주기를 맞아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참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