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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사고락(生死苦樂)의 직무 (성유축성미사 강론)
   2017/04/14  9:53

성유축성미사


2017. 04. 13. 범어대성당

 

오늘 우리는 이 미사 중에 교회가 앞으로 일 년 동안 사용할 병자성유와 예비신자성유, 그리고 축성성유를 축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유축성 전에 신부님들의 서약 갱신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신부님들은 자신이 예전에 사제품을 받았던 그때를 기억하며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제 직무에 더욱 충실할 것을 다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우분들은 오늘 서약 갱신하시는 신부님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하시는 정달용 요셉 신부님과 이홍근 바오로 신부님, 박병기 베네딕토 신부님과 곽길우 베드로 신부님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제자로 불러주시고 사제로 세워주신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드러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일찍이 신부님들을 선택하시어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영을 보내 주시어 천상능력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입혀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을 ‘주님의 사제들’이라 불리고, ‘우리 하느님의 시종들’이라 불릴 것이라 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 주님께서 하셨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쉽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목자가 양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할 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체포되시어 그 해 3월 7일 새남터에서 치명하신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 성 베르뇌 주교님께서 생전에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냈던 편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느 교우촌을 방문했을 때의 장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그 깊은 심산유곡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교우촌을 찾아가면 말은 통하지 않는데도 신부가 앉아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아서, 남녀노소가 신부가 기뻐할 일 같으면 뭐든지 하려고 끊임없이 살핍니다. 어쩌다가 신부 입에서 조선말 한마디 튀어나오면 온 신자들이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죠. 어린아이는 이름 모를 꽃 한송이 따가지고 와서 살짝 놓고 가고, 어른들도 조금이라도 신부가 눈길을 주는 것이 있으면 좋아하는 줄 알고 즉시 갖다 놓는 겁니다. 
신부가 다음 교우촌을 향해 출발하면 교우들은 ‘안녕히 가십시오.’ 하는 말도 못하고 몰려서서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모습이 사라질 때 쯤 거기 모였던 모든 교우들이 소리 높여 울기 시작하지요. 갑작스런 그들의 울음소리에 가슴이 아파 되돌아가면 신부를 붙잡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말씀 한마디만 남기고 가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마디 하고 가면 또 따라와, ‘더 오지 마라.’ 그러면 거기에 그냥 서 있지요. 깊은 산속에서 그대로 말입니다. 신부가 모퉁이를 돌아갈 때가 되면 또 웁니다. 얼마나 처절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목자와 신자들의 모습입니까! 
저는 이 편지를 보면서 제가 어릴 때 다니던 공소에 본당신부님께서 판공성사 주시러 오시던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공소 신자들은 며칠 전부터 신부님을 모시기 위해서 정성껏 준비를 합니다. 신부님께서 하루 주무시고 갈 공소 방을 청소하고 이불을 빨고 군불을 때고 음식을 준비합니다. 신부님께서 오신다는 시간에 거의 모든 신자들이 공소에 나와서 신부님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낮에 시간이 나는 사람들은 낮에 성사를 보고, 밤에 시간이 나는 사람들은 밤에 등불을 들고 공소에 올라와서 성사를 보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박재수 요한 신부님께서 본당신부님이셨는데 공소에 오시면 몇 안 되는 아이들이었지만 틈틈이 저희들을 위해 옛날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튼 날 아침에 모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시고 난 후 신부님은 떠나시는데 떠나시는 신부님을 배웅할 때까지 보게 되는 1박2일 동안의 사제와 신자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전의 이런 초대교회 모습이나 교우촌 같은 모습들을 떠올리면서 오늘날 사제와 신자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참으로 서로 믿고 따르고 위해주고 감싸주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이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뭔가 잘못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바르게 살고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에 따라 산다면 참으로 좋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달 어느 날 교구청 직원들과 함께 시내 극장에 가서 영화 ‘사일런스’를 단체 관람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아시다시피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언젠가 일본 큐슈지방 성지순례를 갔을 때 소토메 지역의 바닷가 언덕에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이 있어서 들린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박해와 고문이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었고, 더구나 소설 내용이 그렇게 믿음이 좋은 예수회 선교사제가 결국에는 배교를 한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신부님은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배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자들의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그야말로 엄청난 갈등과 심적 고통을 겪으면서 등 떠밀리듯이 성화를 밟게 되는데, 그 순간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침묵 가운데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함께 고통을 받으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목자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보람은 자신이 수행하는 직무를 통해서 옵니다. 그 직무란 다름이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직무이며 신자들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하는 직무인 것입니다. 이 직무 외에 다른 데서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찾는다면 이는 참으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신부님들이 더욱 예수님을 닮은 사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기도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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