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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책, 스스로 꾸짖음이라 (청하공소 ‘최해두 회심 경당’ 봉헌미사 강론)
   2023/03/28  16:38

청하공소 ‘최해두 회심 경당’ 봉헌미사

 

2023 03 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2007년 4월 30에 최영수 대주교님께서 교구장으로 착좌하시고 제가 같은 날 보좌주교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 해 11월에 이곳 청하에 와서 조립식으로 새로 지은 청하공소를 축복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청하공소를 다시 짓게 되어 오늘 이렇게 봉헌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 내리시길 빕니다. 그리고 오늘이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인데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님께서 우리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빕니다.

 

포항에서 죽도성당 다음으로 신앙공동체가 설립된 것은 청하공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959년 5월 5일에 청하에 사시던 김호현 라파엘 회장님께서 포항본당의 안덕화 베드로 신부님과 함께 청하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공소 설립 기념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후 라파엘 회장님 댁에서 공소예절을 하다가 1962년에 향교 옆의 기와집과 대지를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1988년 여름에 제가 포항 덕수성당 주임으로 발령받고 청하공소를 방문했을 때는 폐허가 되어 있었고, 땅도 등기 이전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보를 김호현 라파엘 회장님의 부인인 안나 할머니께서 해주셨는데, 다행히 매입한 영수증이 있었기에 법원에 소송을 하여 등기를 교구 앞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 그 땅을 팔고 이 땅을 매입하여 사제관부터 짓고 권혁시 신부님이 한 동안 사시다가 15년 전에 공소 건물을 지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청하공소를 새로 벽돌과 콘크리트로 튼튼하고 아름답게 짓게 된 것은 조정헌 신부님과 태왕건설의 노기원 회장님 덕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대구가톨릭경제인회장이기도 하신 노기원 회장님께서 경당 건축 경비를 다 봉헌해 주셨습니다.

조정헌 신부님께서는 2009년에 현직에서 퇴임을 하신 후 대구에 오셔도 되는데, 포항이 좋고 청하가 좋아서 이곳 청하공소의 작은 조립식 사제관에서 지금까지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이곳에 공소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흥해로 유배를 왔다가 자신이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며 돌아가신 최해두 선생의 생애를 아시고 그분을 기념하고, 오늘날 사람들이 조용히 와서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할 수 있는 경당을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축복하는 이 공소 건물을 ‘최해두 회심 경당’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천주교에 대한 4대 박해가 있었는데 그 중의 최초의 큰 박해가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입니다.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했던 정조 임금께서 승하하시자 나이 어린 순조가 임금에 오르게 되었는데, 영조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정순대비가 섭정을 시작하면서 천주교에 대하여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에 최초로 들어와서 선교를 했던 중국인 사제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을 비롯하여 대부분 남인 학자들이었던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홍낙민, 이가환 등 100여 명의 신자들이 사형되었고, 400여 명의 사람들이 유배를 갔습니다. 그때 정약용은 1801년 2월에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왔고 최해두는 5월에 흥해로 유배를 왔던 것입니다. 이런 박해의 참상을 중국 북경의 주교님께 알리는 황사영 백서가 같은 해 9월에 발견되어 장기에 유배왔던 정약용은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그 결과 황사영은 능지처참형을 받아 순교했고, 정약용은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다시 귀양길에 오르는데, 나주까지 같이 가다가 정약전은 흑산도로 가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갔던 것입니다.

황사영의 부인이 누구입니까? 정난주 마리아입니다. 제주도 대정읍에 묘가 있지요. 정난주가 정약용의 첫째 형 정약현의 딸입니다.

2-3년 전에 나왔던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보셨는지요? ‘자산’은 ‘흑산黑山’을 말하는데, 그곳에 유배를 갔던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에 나는 온갖 어류와 해조류 등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기록한 책이 자산어보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흥해로 귀양 왔던 최해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최해두도 정약종 형제들처럼 초창기 조선천주교회가 세워질 즈음에 입교하여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1801년 2월에 갑자기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고 부친(최창은)과 삼촌(최창주), 장인(윤현)까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수하였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배교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해 5월 10일에 흥해로 유배를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해두는 배교자 중에서도 좀 다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배 온 지 한 5-6년 뒤에 자신이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참회하면서 ‘자책自責 스스로 꾸짖음이라.’이라는 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비록 배교하였지만 나중에 참회하고 세상을 떠난 그를 당신의 영원한 품에 받아들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자책自責 스스로 꾸짖음이라.’는 책이 필사본으로 딱 한 권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2013년에 박형무 프란치스코 라는 분이 그 책을 현대문으로 만들고 해제를 써서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4대리구장이셨던 전재천 신부님께서 추천사를 쓰셨습니다.

그 책에는 고문과 현대문, 그리고 필사체 복사본이 나오는데, 현대문으로 보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두루 마음이 어수선하고 답답하여 두어줄 글을 기록하노니, 슬프고 슬프도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애초에 천주를 모르는 이는 달리 어찌 할 도리가 없거니와, 나는 이미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여, 근 이십 년을 죽기로써 받들어 섬기다가, 시절이 불행하여 성교회에 박해가 크게 닥치니, 평소에 열심히 봉행하여 믿음의 큰 덕을 세운 이는 우리 주 예수를 본받아 순교의 큰 은혜로 다 돌아가시고, 나 같이 아무런 공도 덕도 없고, 죄 많고 실패한 사람은 썩고 썩어 신유년 우리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 상으로 내려 주신, 그렇게 흔한 순교의 큰 은혜를 받지 못하고, 절박하고 원통하게 나 혼자 빠져나와, 이 흥해 옥중에 욕된 목숨이 남아 살았으니, 이 무슨 일인고!”

내용이 참으로 처절합니다. 최해두는 유배생활의 어려움보다는 죽기로 신앙했던 천주를 버린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습니다. 순교로 치명한 동료들을 생각하면 순교의 은혜를 스스로 차 버리고 살아남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고 작아 보였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최해두의 회심의 결실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큰아들 최영수 필립보입니다. 그는 부친이 흥해로 갈 때 열한 살이었습니다. 그는 부친에게 교리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친께서 유배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고 흥해에 내려와서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최영수 필립보는, 아버지에게 받은 신앙의 씨앗이 고난 중에도 싹이 자라나 꺾이지 않았고, 당시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님을 도와 열심히 교회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1839년 기해박해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는, 1841년 10월 24일에 한양 우포도청에서 곤장 100대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문초를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찌 집안 대대로 믿어오던 천주를 배반하고 부친의 가르침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우포도청등록 1841년 4월 25일)

그리하여 최영수 필립보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선정되어 현재 시복 추진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김 프란치스코라는 분이 계시는데, 작년 연말에 상영되었던 영화 ‘탄생’에도 나왔습니다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일곱 번째 편지에 나오는 분입니다. 이분은 김대건 신부님과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상황을 알려주기도 하였던 ‘조선의 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80년대 중반에 아직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확보되기 전에 당시 조선 교구장이셨던 리델 주교님께서 조선시대 순교자들의 시복 재판정을 열었었습니다. 그때 김 프란치스코 할아버지께서 증인으로 출석하여 자신은 경상도 청하 출신이라고 밝히고, 103위 성인 중에서 61분의 순교 사실을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은 김 라우렌시오와 김 막달레나라고 하였기에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오래전부터 청하에 신자들이 살았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청하에 공소를 새로 짓고 ‘최해두 회심 경당’으로 이름하여 오늘 봉헌하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신앙의 깊이는 예전에 비해 더욱 얕아지고, 냉담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이비 신앙마저 활개를 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비록 배교하였지만 다시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왔던 최해두는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신앙이 약하고 흔들릴 때 스스로를 꾸짖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붙잡을 수 있도록, 다시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이 경당에 자주 찾아와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최해두 회심 경당을 봉헌하면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님께서 우리의 원의를 도와주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