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모세와 같은 사람 (5대리구 1지역 친교의 해 지역방문 미사 강론) |
2023/08/10 10:46 |
친교의 해 지역방문 미사
2023. 08. 03. 5대리구 1지역 원평성당
우리 교구는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10년 장기사목계획에 따라 ‘친교의 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친교의 해를 살아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오늘 하고 있는 이 행사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주교가 매월 첫 목요일에 대리구의 한 지역을 방문하여 신부님들과 간담회를 가지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와 성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은 5대리구 1지역으로 원평성당에서 갖게 되었습니다.
친교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에 친교를 이루지 않는 교회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에 가톨릭교회 안에서 있었던 가장 큰 사건 하나를 든다면 그것은 단연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개최되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5년 12월 8일에 폐막하면서 교황청에 ‘세계 주교 시노드 사무국’이 개설되었습니다. 그것은 공의회에서 결의한 사항이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기구입니다. 공의회 내용과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몇 년에 한 번씩 세계 주교 시노드를 개최하고 있는데,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 ‘제16차 세계 주교 시노드 정기총회’인 것입니다.
이번 세계 주교 시노드의 특이한 점은 대의원 주교들만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본당과 모든 교구와 모든 나라와 대륙에서 시노드 주제에 대한 논의를 가지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노드의 주제가 ‘시노드적인 교회를 위하여-친교, 참여, 사명’입니다. 시노드의 주제가 시노드인 셈입니다. ‘시노드’란 말은 ‘함께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구가 현재 ‘친교의 해’를 살고 있는데, 지금 진행되는 시노드의 주제와 잘 맞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시노드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만남과 경청과 식별을 통하여 친교와 참여와 사명을 잘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 공동체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정신을 제대로 살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시노드적인 교회가 되고 친교의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친교를 굳이 구분한다면 하느님과의 친교, 이웃과의 친교, 피조물과의 친교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미사와 성시간을 가지는 것은 하느님과의 친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교와 신부님들과 그리고 회장님들과 함께 간담회를 가지는 것은 이웃과의 친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교구 사목국에서 생태영성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송영민 신부님을 통하여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가지고 강의 영상을 만들어 교구 유튜브에 올리고 있는데, 보시고 계십니까? 보시는 분들은 피조물과의 친교를 이루고 계시는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3주 전에 장마 기간에 많은 비가 와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경북 북부 지방은 산사태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고, 충북 오송에서는 지하차도가 물에 잠겨 어처구니없는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다. 중국에도 여기저기에 물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폭염입니다. 오늘 대구가 37도까지 올라갔습니다. 지구가 펄펄 끓고 있습니다. 얼마 전 유엔 사무총장이 연설하기를, ‘지금 지구는 온난화를 넘어서 열대화로 가고 있다고, 그래서 지금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상 기후, 기후 위기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초래한 것입니다. 과잉 생산, 과잉 소비가 빚은 결과입니다. 각 나라가 경제발전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한 고쳐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유감스럽게도 1인당 탄소 배출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떤 개인이 힘쓴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과 기업과 온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생활습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덜 사고, 덜 쓰고, 덜 버리는 삶,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피조물과의 친교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장 잘 이룬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여러 사람이 있겠지만 저는 모세를 들고 싶습니다.
마침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는 탈출기 40장으로서 탈출기의 마지막 부문입니다. 모세가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성막을 세우고 그 안에 천막을 치고 또 그 안에 계약의 궤를 모십니다. 그랬더니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성막에서 올라갈 때 길을 떠났고 구름이 올라가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모든 여정 중에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리고 밤에는 불 기둥이 길을 안내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여정 중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여기서 ‘모세’라는 인물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볼까 합니다. 구약성경 중에서 제일 앞에 나오는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고 합니다. 창세기에는 모세가 나오지 않습니다만,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주인공은 모세입니다. 이 네 권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가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탈출기 3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소명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날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양들을 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 한 가운데에서 나타나시어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십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모세가 대답하니, 하느님께서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모세는 이러한 하느님의 소명을 받고 온갖 고생을 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나안 땅, 자기 조상들의 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살았던 그 땅에는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모세오경 중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 마지막 장(34장)은 모세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모압 땅 느보 산으로 올라가자 주님께서 앞에 펼쳐진 가나안 땅을 보여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내가 왜 못 갑니까?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주님께서 시키신 일을 다 했는데, 왜 나만 못 가게 합니까?”하고 대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의 나라 땅 모압의 느보 산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였던 것입니다.
신명기 34,10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우리가 감히 모세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모세의 그 믿음, 그 순명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과의 친교에 있어서 아주 뛰어났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 간의 중재자 역할을 충실히 했던 것입니다. 백성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마치 자기 잘못처럼 백성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온 정성을 다하여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십계명을 받기 위해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간 사이에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신이라며 섬겼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나 기가 차서 십계판을 던져서 금송아지를 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느님께 간구하기를, 생명의 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도 좋으니 이 어리석은 백성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세를 조금이라도 닮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3,47-53 말씀입니다. 마태오 13장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으로 그물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비유 이야기를 끝맺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들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렸지만, 밀과 함께 가라지도 자라는 것입니다. 그물을 던졌지만 좋은 것도 잡히고 나쁜 것도 잡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씨 뿌리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되며, 그물 던지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성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판단하고 심판하실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물을 던질 뿐입니다. 씨를 뿌릴 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포용하고 인내하며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마태오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 몇 사람의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친교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