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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음에서 생명으로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미사 강론)
   2024/04/03  9:29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2024. 03. 30. 범어대성당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리시는 평화가 우리나라와 온 세상에, 특히 지금 분쟁과 전쟁 중에 있는 나라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마르 16,1-7)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몇몇 여인들이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에 무덤에 갔더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흰옷을 입은 웬 젊은이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셨으니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복음서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관념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이었다는,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듣게 될 복음(요한 20,19-31)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슨 유령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실제 육신을 지닌 채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는 부활 신앙을 믿는 사람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일마다 신앙고백을 하면서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레 미제라블’을 썼던,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무덤에 들어갈 때 내 일생을 마쳤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하루 일과를 마쳤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죽은 다음 날에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의 이 말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우리 인생을 죽음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살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부활이 얼마나 기쁜 일이고 큰 축제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일 년 중에서 가장 ‘거룩한 밤’을 맞이하였으며, 가장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밤을 교회는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부활 성야’라고만 불렀는데 몇 년 전부터는 ‘파스카 성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삼일’도 ‘파스카 성삼일’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삼일 동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파스카’는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인도로 이루어진 그 출애급 사건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해마다 니산달 14일이 되면 파스카 축제를 벌였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이 파스카 축제 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파스카(Pascha)’라는 말은 ‘건너가다’, ‘지나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성목요일 저녁 만찬미사 때 읽었던 요한복음 13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요한 13,1)

예수님께서 오늘 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오늘 이 미사 중에 50명의 예비신자들이 세례성사를 받고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우리도 예전에 세례성사를 통하여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건너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서간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이 말씀처럼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되살아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쁜 날이겠습니까!

 

그런데 부활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사실 자신을 버리고 죽는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제 곧 30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후보들마다 자신이 당선되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집어내어 상대를 공격하면서 자신이 제일 나으니까 자신을 뽑아달라고 호소합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현실 정치에 실망하곤 합니다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좀 더 나은 사람을 뽑기는 뽑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도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자신을 낮추고 욕심을 버리기가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버리고 끝까지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을 사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상(구상준 1919-2004) 선생님의 ‘부활송’이라는 시를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죽어 썩은 것 같은

매화의 옛 등걸에

승리의 화관인듯

꽃이 눈부시다.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

저렇듯 죽어도 죽지 않고

또 다시 소생하고 변심함을 보느니

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한

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우리 삶은 허무의 수렁은 아니다.

봄의 행진 아롱진

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나는 우리의 부활로써 성취될

그날의 우리를 그리며 황홀에 취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