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그룹웨어
Home > 교구장/보좌주교 > 교구장 말씀
제목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2024년 제2차 교구 사제 연중피정 파견미사 강론)
   2024/06/24  11:0

2024년 제2차 교구 사제 연중피정 파견미사

 

2024. 06. 21. 한티피정의 집

 

날씨가 무덥고 더위에 지칠 때 사람들은 시간을 내어 피서(避暑)를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곳에 피정(避靜)을 왔습니다. ‘피서’는 글자 그대로 ‘더위를 피한다’는 뜻인데, ‘피정’은 고요한 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곳으로 피한다는 뜻입니다. 즉 피정은 ‘시끄러운 세상을 피하여 조용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가끔 쉴 필요가 있습니다. 일에서, 분주함에서 쉴 필요가 있습니다. 휴식(休息)이라고 할 때, ‘休’ 자는 나무에 사람이 기대고 있는 모양이고, ‘息’ 자는 ‘마음 心’ 위에 ‘스스로 自’ 자가 올라가 있는 모양이기에 휴식이라는 것은 몸을 쉴 뿐만 아니라 마음을 스스로 가다듬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피정이란 것은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시간이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피서이고 좋은 휴식의 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이 동의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침 오늘이 하지인데 대구에는 며칠 전부터 폭염주의보가 내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분도 며칠 지내보셨겠지만, 이곳 한티는 에어컨이나 선풍기 한 번 켜지 않아도 지내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런 피정의 집이 우리나라에 또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로 열왕기 하권 11장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탈야의 만행과 결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탈야는 그 악명높은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 사이에 난 딸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딸입니다. 그녀는 왕인 아들이 죽자 실성하여 왕족들을 죽이고 자신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여호야다 사제가 아탈야의 손에서 어린 아기 아모스 왕자를 구하여 주님의 집에서 6년 동안 숨겨서 키웠습니다. 칠 년째 되던 해에 여호야다 사제는 군인들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켜 아탈야를 몰아내고 어린 아모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바알 신전을 허물고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을 새롭게 맺는 등의 개혁을 단행하는 이야기를 오늘 독서는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모스 왕은 여호야다 사제가 살아있을 때는 주님과 맺은 계약대로 잘 따라 하였지만 그가 죽자 금세 우상숭배에 빠졌고, 바른 말을 하는 사제 즈카리야를 성전 뜰에서 죽였습니다(역대기 하권 24,18-22 참조). 갓난아기였던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주었던 분의 아들을 돌로 쳐 죽였던 것입니다. 결국 얼마 안 가서 아모스 왕 본인도 왕궁에서 신하들 손에 죽게 됩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의 우상숭배와의 하느님의 외로운 전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왕정시대를 보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긴 왕은 다윗 왕 말고는 거의 없습니다. 처음엔 잘하다가도 금새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 우상은 인간의 탐욕이라 생각됩니다. 식지 않는 인간의 욕심인 것입니다. 그것이 권력이든 명예든, 돈이든 쾌락이든, 하느님 아닌 것에 자신의 마음을 온통 빼앗기는 것이 우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상을 영어로 Idol이라 합니다. 오늘날 인기 있는 연예인이나 가수를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Idol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마태 6,19-23)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부님들 중에는 피정하러 갈 때, 핸드폰을 가지고 가지 않는 분도 있고, 피정 동안 전원을 꺼놓고 지내는 분도 계십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아직 온전히 맡기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난 4월에 교구청 신부님들 몇 사람과 함께 흑산도에 갔다 왔습니다. 흑산도라도 하면 천주교를 믿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그곳으로 유배를 갔던 정약전이 떠오를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영화로도 나왔습니다만, 정약전 선생은 실학자답게 흑산도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 나는 온갖 어패류와 해조류를 관찰하여 ‘자산어보’라는 저서를 남겼습니다.

흑산도에는 흑산본당이 있고 여러 공소가 있는데, 본당 신부님의 안내로 하루는 ‘사리공소’에 들렸습니다. 그리고 공소 바로 옆에는 정약전 선생을 기리는, 초가집 형태의 ‘사천서원’이라는 집이 있었고, 그 집에 평신도 선교사 한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김주중 다니엘’이라는 분이신데, 살고 계신 조그만 방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학교 선생님을 중간에 그만두고 최저 생활비도 안 되는 봉급을 받으며 신안군 문화해설사 겸 광주대교구 선교사로 살고 있었습니다. 벽에는 선교사 파견식 때 받은 성구 글이 걸려있었습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시편 37,5)

 

오늘 기념일을 맞이한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이나 김주중 다니엘 선교사 같은 분이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 노래했던,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영이 가난한 사람, 영이 깨끗한 사람, 겸손하게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그 정신을 알고 묵상하는 수준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의 일상에서 실천해야 하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저를 포함하여 나약한 우리들이 그 정신을 알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도록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