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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맙습니다. 양 수산나 여사님 (양 수산나 여사 장례미사 강론)
   2024/09/13  9:21

양 수산나 여사 장례미사

 

2024. 09. 12.(수) 오전 10시 대봉성당

 

한 8년 전에 독일 사람이며 우리 교구 사도직 협조자였던 옥잉애 여사 장례미사를 복자성당에서 집전했었는데, 오늘은 영국 사람인 양 수산나 여사 장례미사를 이곳 대봉성당에서 드리게 되었습니다. 양 수산나 여사께서는 5년 5개월 전 대구 가톨릭 요양원에 가시기 전까지 대봉성당을 다니시며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양 수산나 여사께서는 1959년 12월 8일에 한국에 도착하셔서 평생을 대구대교구의 Auxilista, 즉 사도직 협조자로 사셨습니다.

사도직 협조자는 성직자나 수도자는 아니지만 평신도로서 하느님과 교회의 부름을 받아 교구장 주교의 명이나 허락을 얻어 교회와 세상에 필요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구에는 40여 분의 사도직 협조자 분들이 계십니다. 양 수산나 여사께서는 오늘날의 우리 교구와 한국의 사도직 협조자를 있게 한 초창기 멤버이며 공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 수산나 여사께서 대구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전에 한국 오심 50주년, 그리고 60주년을 기념할 때 몇 번 말씀드렸고 언론에도 나온 적이 있기 때문에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양 수산나 여사로부터 왜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양 수산나 씨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다녔는데 어느 방학 때 프랑스에서 있었던 어떤 캠프에 참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한국에서 오신 어떤 분의 강의를 들었는데 한국 교회사 이야기였습니다. 성직자나 선교사가 들어와서 선교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나서서 천주교를 배우고 중국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또 세례를 주고 하면서 시작하였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사도직 협조자이며 오스트리아 사람인 하 마리아 여사(초대 SOS 어린이마을 원장)를 알게 되었고, 서정길 요한 대주교님의 초청으로 같이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20대 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우리나라에 오셔서 평생을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를 위해서 사시다가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하느님께 가신 것입니다.

 

양 수산나 씨는 2019년 4월에 갑자기 달성군에 있는 대구가톨릭요양원에 스스로 들어 가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몸이 좀 더 괜찮을 때 들어가서 친구도 사귀고 하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서 1950년대 말 그 어려운 시절의 한국에 오셔서 다른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사셨습니다. 저도 한 번 초대받아서 가봤습니다만, 은퇴를 하시고 난 후 이 근처 작은 아파트에 사셨는데, 얼마나 검소하게 사는지 놀라웠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기쁘고 즐겁게 사셨습니다.

사도직 협조자들은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교구장 주교와 함께 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회합 시간을 가지고 난 후 식사를 함께합니다. 양 수산나 씨는 그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적절한 말씀을 해주시고 분위기를 재미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민요 아리랑을 즐겨 부르셨고 춤도 잘 추셨습니다. 그렇게 흥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의를 갖추시고 절제도 잘 하셨습니다.

지난 1월에는 회합에 못 나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요양원에 가서 면회를 하고, 요양원에 계시는 다른 사도직 협조자 분들과 함께 다과를 같이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7월에 전인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병문안을 했었는데, 그것이 저로서는 마지막 대면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저께 수산나 씨가 돌아가신 날 오후에 가톨릭병원의 빈소에 가서 연도를 드리고 나서 사도직 협조자 몇 분과 장례 절차에 대하여 의논하고 유언장을 함께 보았습니다. 영어 필기체로 쓴 것이었는데 앞부분 두 단락만 들려드리겠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감사하며 죽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속해있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쁨 가득한 삶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비천함에 쓰러질 수 있음에도 단념하지 않으심을 신앙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저의 가족과 친구분들께, 그리고 이들과 함께한 모든 분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은 저에게 하느님 사랑의 도구였으며, 저로 인해서 상처를 입으신 분이 있다면 용서를 청합니다.”

 

그날 저는 빈소에 마련된 방명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양 수산나 씨. 고맙습니다.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양 수산나 씨가 65년 전 우리나라에, 그것도 대구에 오셔서 고맙고, 평생을 사도직 협조자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참으로 기쁘게 해주셔서 고맙고, 우리들의 모범이 되어주셔서 고맙고, 또한 제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 한결같이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셔서 고맙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수산나 메리 영거(Susannah Mary Younger) 여사님. 천국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