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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가 넘어갑니다! (달마야, 놀자!)
   2013/05/17  22:29

주: 석탄절을 맞이하여 모든 불자들이 성불하길 기원하면서 지난 2008년에 쓴 글을 다시 올려봅니다.^^*

 

 

                  소가 넘어갑니다!


  십자가를 안테나로!

  오늘이 석가탄신일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최근 광우병 수입소고기 우려 때문이어서인지 그런지 지난 밤 저의 꿈에는 20여년 전에 돌아가신 부친이 비틀거리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나타나셨습니다. 수년 전에는 저에게 ‘교통사고를 조심하라’는 뜻에서 검은 세단을 타고 나타나기도 하셨는데 이번에는 ‘광우병도 조심하라’고 아마 비틀거리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비틀거리는 소가 옆으로 맥없이 넘어지기에 저는 기겁을 하며 놀라서 큰 소리로 “아버지, 소가 넘어갑니다! 위험해요!”라고 외치니 부친은 잘 안들린다는 듯 “뭐? 속아넘어간다고? 너도 조심해!”라고 반문하시며 사라지셨습니다.


  지난 11일,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쇠고기 협상과정에 대한 국정조사를 촉구하면서 “미국이 이번 쇠고기 협상과정에서 한국을 기만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협상 과정 전반에 대해 국회에 국정조사를 요청하고 졸속 소고기 협상의 취소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미국이 우리를 기만한 것인지 아니면 정부당국이 알면서도 일부러 속아 넘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국민들이 더 이상 먹거리에 대한 불안 등으로 촛불을 들고 시위에 나가지 않고 오히려 성모성월이나 석탄절 행사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게 되기를 바라면서 민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흰 소가 끄는 수레’와 코믹영화 ‘달마야, 놀자’를 소개합니다. 가브리엘통신


                     <흰 소가 끄는 수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서 페다고지(Paidagogos)의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페다고지란 큰 집안의 하인으로서, 그 집 아이를 어릴 때부터 돌보면서, 그 아이와 함께 위험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 학교에 가고 또 복잡한 도시 안을 돌아다니며, 그가 보여주는 모범과 그가 해주는 충고와 그가 내린 결정을 통해 그 아이가 자신이 처한 환경 안에서 살아나가는 것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박범신 선생님의 연작소설 「흰 소가 끄는 수레」(창작과 비평사 1997)가 있습니다.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제목이 상징하는 바의 "흰 소"와 또 "흰 소가 끄는 수레"가 무엇일까, 라는 물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소설의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 이야기를 각색하여 새롭게 꾸며 봅니다:


   (생각이 깊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집은 넓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되고 낡아 기둥뿌리는 썩고 흙벽도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불이 났습니다. 집 전체가 불길에 싸여 버렸는데 자녀들이 안에 있습니다. 불이 났는데도 아랑곳없이 집 안에서 자녀들이 철없이 놀고 있는 것입니다. 다급한 나머지 젊은이는 "얘들아, 나오너라. 빨리!" 하고 안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불이 뭔지도 모르는 철없는 애들이라 놀이에 빠져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큰일났습니다. 다 죽게 될 판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윽고 젊은이에게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얘들아, 여기 재미있는 것이 있다. 소가 끄는 수레가 있으니, 너희를 모두 태워주마." 그제서야 애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불난 집에서 나왔고, 젊은이는 애들에게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선물했습니다.)


   만일 아이들이 불난 집에 그냥 철없이 머물러 있었다면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타하는 젊은이의 사려 깊은 외침에 불난 집에서 나올 수 있었고,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흰 소가 끄는 수레에 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 즉 하늘나라를 상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불난 집(火宅)은 바로 이 세상, 즉 생로병사와 온갖 욕심으로 불타고 있는 이 세상, 지상의 나라를 말합니다. 수레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구하는 젊은이는 말씀이십니다. 아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구원받는 아이들처럼, 비록 철없이 살아왔다 하더라도 지상의 나라가 아닌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흰 소가 끄는 수레에 낙오되지 않고 올라타길 바랍니다. 흰 소가 끄는 수레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불타고 있는 집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불타고 있는 집에서 우리가 나온다는 것은 삶의 전환점을 말합니다. 이를 신앙의 눈으로 보아서는 영적 성숙에로 나아감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영적 성숙의 길을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심우도(尋牛圖)에서 빌려올 수 있습니다. 어느 절을 찾든지 대웅전 바깥벽으로 그려진 벽화를 보게 됩니다. 십우도(十牛圖)라 불리기도 하는 심우도는 진아(眞我), 즉 참된 나를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인 소를 찾아 나서는 것을 묘사합니다. 고독, 명상, 관상, 영적 성숙에로의 여행을 이야기하는 연이은 그림들은 먼저 소의 발자국을 일견(一見)하기까지 환상 속에서 길을 잃은 동자를 보여줍니다.


   한 동자가 잃어버린 소를 찾아 나섭니다[심우(尋牛)]. 소의 고삐를 손에 든 동자는 소의 발자국을 만납니다[견적(見跡)]. 소의 발자국을 따라가던 그는 소를 발견합니다[견우(見牛)]. 소를 찾습니다[득우(得牛)]. 그런데 찾아 얻은 소는 검은 소입니다. 천방지축 야단스럽게 날뛰는 검은 소를 동자는 가만히 다독거립니다. 그렇게 소를 길들입니다[목우(牧牛)]. 검은 소가 점차 흰 소로 변합니다. 동자는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옵니다[기우귀가(騎牛歸家)]. 심우도는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돌아오는 과정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를 공자님의 방심(放心)과 구심(求心)으로 이야기하여 방심에서 구심, 즉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과정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는 애착에서 이탈로 이르는 즉 영적 성숙의 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절정에 이릅니다. 소는 사라지고 그 동자 홀로 남습니다[망우존인(忘牛存人)]. 그리고는 소뿐 아니라 동자도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인우구망(人牛俱忘)]. 원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 이 상태를 만다라(Mandala)라고 부릅니다. 즉 상징적인 원[○]의 형태가 무(無)로써 대변하여 나타납니다. 관념적으로 말할 때, 심우도는 합리화(rationalization)로부터 원으로 대변되는 분화되지 않은(undifferentiated)또는 구별하지 않는(non-discriminating) 의식으로의 성숙을 뜻합니다. 이를 편재(遍在)라고 부르기도 하고, 보나벤뚜라(Bonaventura)의 표현을 빌면 Co-incidence라고도 부릅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입니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애착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봅니다[판본환원(返本還源)].


   그런데 12세기 중국에서는 다른 그림들이 첨부되어서 정각(正覺)을 터득한 노인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시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써 끝이 납니다[입전수수(入廛垂手]. 여기서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 즉 영적 성숙을 이룬 사람이 아직도 영적 침체에 빠져 있거나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저자거리, 즉 세상으로 돌아오는 참된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페다고지가 되고 싶습니다. 흰 소가 끄는 수레에 사람들을 태우는 젊은이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돌아오는 동자가 되고 마침내는 세상으로 나오는 노인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출처: 민 요셉신부님의 ‘일상의 신화를 찾아서’ 중에서 )

 

                 <영화 ‘달마야, 놀자’>


  유흥업소의 주도권을 놓고 조폭들과 일대 격전을 벌이던 조폭 "재규"(박신양 분) 일당은 되려 무지막지한 습격을 당하고, 깊은 산중의 암자로 일단 몸을 숨긴다. 더이상 숨을 곳도, 보살펴 줄 조직의 힘도 끊긴 가련한 재규 일당에게 유일한 도피처가 될 그 곳엔 오로지 자비와 진리를 수행 중인 청명스님(정진영 분)과 동료 스님들이 살고 있었다.


  한편 재규 일당의 무단 사찰진입으로 그 동안의 모든 일상을 뒤집어지고 고요했던 도량은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재규 일당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스님들은 그들과 약속한 일주일의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고, 보스의 연락만을 기다리는 재규 일당의 심정도 역시 편치만은 않다. 절 생활의 무료함과 초조함을 달래기 위한 재규 일당의 일과(?)는 사사건건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하는 것이었고 또 이들을 젊잖게 내쫓고 평화를 찾기 위한 스님들의 눈물겨운 대책은 결국 그들과 기상천외한 여러 가지 시합대결(108배 절하기, 369놀이, 밑빠진 독에 물채우기 등...)로 이어진다...


            <말씀에 접지하기; 콜로 3, 9-10>

 

 (마르코니 문화영성 연구소 / http://cafe.daum.net/ds0y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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