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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손 안의 연장 (남대영 루이델랑드 신부님 추모 감사미사)
   2013/05/03  11:17

남대영 루이델랑드 신부님 추모 감사미사


2013 04 27 예수성심시녀회 포항 모원 성당


 찬미예수님!

 오늘 우리는 남대영 루이델랑드 신부님께서 올해 ‘포항을 빛낸 인물’로 선정됨에 따라 예수성심시녀회 포항 모원 성당에서 남신부님을 추모하며 감사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포항정신문화발전연구위원회에서 2008년부터 해마다 포항의 역사 문화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기고 타계한 인물 중에서 ‘포항을 빛낸 인물’ 한 분을 뽑아서 기념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2008년 제1호 인물로 연오랑세오녀 부부(157년)를 필두로 고려시대의 포은 정몽주 선생님 등의 인물을 해마다 차례로 선정하여 추대하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올해는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개인이나 단체의 추천을 받아 후보군을 선정하여 위원회에서 결정하였는데 최종적으로 남대영 신부님이 선정된 것입니다. 이것은 더욱 합리적으로 보완된 과정을 거쳐 선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대영 루이델랑드 신부님을 올해 포항을 빛낸 인물로 선정해주신 포항시와 포항정신문화발전연구위원회에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그리고 이렇게 훌륭하신 신부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저는 살아생전에 남신부님을 뵌 적은 없습니다. 문서로, 혹은 구전으로 알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 계시는 연세 많으신 수녀님들은 남신부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남신부님은 지금부터 한 78년 전에 ‘예수성심시녀회’라는 수도회를 설립하셨고 그 이듬해에 ‘성모자애원’이라는 복지기관을 설립하셨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남신부님은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의 사제로서 1922년 12월 23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6개월 후에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대구대교구에 파견된 사제로서 충실히 사셨다는 사실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1923년 6월에 한국에 입국하시고 그해 12월 칠곡 가실성당의 주임신부를 시작으로 부산 범일동성당, 대구 남산성당, 영천 용평성당과 영천성당 등 한 26년 동안 본당사목도 훌륭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부님께서는 1950년 3월 25일에 수녀님들과 함께 고아들과 보호자 없는 노인들을 데리고 포항 송정에 터전을 마련하여 살기 시작함으로써 포항과 연관을 맺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말에 포항제철이 송정에 들어오는 것이 결정됨으로써 그곳을 비겨주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이 대잠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으로 압니다. 

 그 당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께서 남신부님을 만나서 '우리나라 최대의 복지는 절대빈곤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꼭 제철소를 지어야 한다.'고 하면서 신부님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신부님은 한 20년 가까이 살던 송정리를 떠나서 500명이 넘는 고아들과 노인들을 포함하여 700여 명의 식구들을 데리고 이 대잠동으로 이사를 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남신부님이 우리나라에 처음 오셔서 사제로 살았었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나, 그리고 해방 후나 6.25전쟁 후에 그 당시 나라 사정이 어떠했는가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개인과 가정뿐만 아니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나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던 그 시대에 그 많은 식구들을 어떻게 먹여 살렸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정말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남신부님께서 1972년 11월 17일 하느님 나라로 가시기까지 50년의 사제생활을 한국에서만 보냈습니다. 그것도 대구대교구에서 보내셨고 그중에 23년을 포항에서 보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1972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6년 반 동안을 갈평에서 사셨습니다. 지금은 피정의 집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성모자애원 요양원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요양원 옆에 조그만 사제관을 지어서 사셨는데 지금도 그 집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2년 전에 갈평에서 4대리구 신부님들 함께 피정을 하였는데 그 때 그 사제관에 들어가 봤습니다. 신부님이 쓰시던 물건들이 일부 남아있었고 참으로 검소하게 사신 것 같았습니다.

 그 때 피정 중에 남신부님의 책이 몇 권 있어서 읽어 본 것 중에 ‘피정노트를 열며’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작음을 의식하고 성인이 되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한다.”

“두 가지 정점, 즉 성성(거룩함)과 능동적인 삶을 목표로 삼는다.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도 배제하지 않은 채 하나씩 실현해 간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남 신부님이 성직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하여 바오로 사도처럼 얼마나 강직하고 철저하게 살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 11월 16일에 남신부님 선종 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하였고, 또 17일에는 40주기 추모미사를 드렸던 것으로 압니다. 이를 계기로 남신부님의 행적이 세상에 잘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그 때 교구의 다른 일로 인해 심포지엄에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만, 그 당시 가톨릭신문에 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심포지엄에서 주제논문을 발표하신 분께서 ‘남신부님은 영성과 자애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통합적인 삶을 사신 거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어느 일간지에서는 한국 근대화와 포항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었고,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 루이델랑드’라는 책을 쓰신 분은 ‘남신부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몸소 살았다’고 평하는 것을 봤습니다. 

 전부가 훌륭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신부님에 대한 지금 가장 확실한 평가는 남신부님께서 세우신 예수성심시녀회의 수녀님들의 사는 모습과, 그리고 현재 사회복지법인 ‘성모자애원’의 많은 복지시설에서 봉사하고 계시는 분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늘, 올해 ‘포항을 빛낸 인물’로 남신부님이 선정된 것을 계기로 남신부님을 추모하고 감사미사를 드리는 것은 남신부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들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남신부님이 남기신 영성과 자애의 정신에 따라 ‘주님 손 안의 연장’으로서 더욱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되는 일이며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는 일이고 우리들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