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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구 최초의 천주교 신자 (을해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미사 강론)
   2016/12/21  13:27

을해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미사


2016. 12. 19. 계산성당

 

지난해가 을해박해가 일어난 지 2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150년이 되는 해이지만, 을해박해 순교자들 중에서 상당수의 교우들이 돌아가신 해이기도 합니다. 특히 오늘 12월 19일은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를 비롯한 일곱 분의 복자들이 순교하신 날입니다.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천주교 박해 중에서 4대박해라고 하면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를 듭니다. 을해박해는 경상도와 강원도에 한정된 박해였고 잘 알려지지 않은 박해였지만 경상도로서는 초창기에 일어났던 아주 큰 박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유박해는 1800년에 정조대왕이 돌아가시고 아들 순조가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등극함에 따라 순조의 증조할아버지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여기에 당쟁이 개입되면서 시작된 대박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과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강완숙 골롬바 등 수많은 초창기 지도자급 교우들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하게 되고 그 당시 한양과 경기도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형성되었던 신앙 공동체들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많은 교우들이 고향을 떠나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북부지방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영양 일원산 등지의 산골짜기에 들어와서 교우촌을 이루고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비록 박해를 피해 산골짜기에 와서 어렵게 살았지만 아무도 굶거나 헐벗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가진 것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생활에 열심이었고 주일과 대축일에는 한 데 모여 공소예절을 지내며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이 1815년 부활대축일이었다고 합니다. 다들 모여서 대축일 첨례를 지내고 있었는데 포졸들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번씩 교우촌에 나타나 먹을 것을 구걸하던 전지수라는 사람이 밀고를 하여 포졸들이 급습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총 7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지방 관영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30여 명의 신자들이 당시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성열 바르바라는 고문이 참기 힘들어서 배교의 유혹에 잠시 흔들렸지만 사위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설득으로 그것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를 하고 풀려나 감영에서 나가다가 때마침 감영으로 압송되던 김종한 안드레아를 만나게 되어 그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려 다시 감영으로 들어오게 되고 모진 고문에 의해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순교자들은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도와주며 서로 격려하고 힘이 되어주며 살았던 것입니다. 
경상감영으로 끌려온 30여 명의 교우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배교하지 않고 순교하였다고 알려진 사람이 14분입니다. 이 중에서 최봉한과 김윤덕은 심문 끝에 혹독한 고문의 결과로 순교를 하였고 나머지 교우들에 대한 감사의 사형선고가 있었지만 사형집행이 떨어지지 않아 1년이 넘도록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밀고자 전지수가 다른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옥졸들이 그를 신자들이 갇혀있는 방에 넣었던 것입니다. 신자들한테 혼 좀 나 보라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그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해주어 그로 하여금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지난 2002년에 관덕정순교기념관에서 을해박해를 주제로 연극 대본 공모를 하였었는데 그 중 우수 작품 세 편을 뽑아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내었습니다. 거기에도 이 전지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여튼 을해박해 순교자 14분 중에 굶주림과 고문 후유증 등으로 다섯 분이 옥사하십니다. 서석봉 안드레아, 김시우 알렉시오, 안치룡, 김흥금, 김장복이 그들입니다. 
김종한 안드레아가 고향에 계시는 형한테 몇 통의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에서 김종한 안드레아가 사형집행이 자꾸 늦어지니까 혹시 순교를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하루빨리 사형집행이 이루어져 순교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을 보면 그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1816년 음력 11월 1일에 사형집행이 떨어져 남은 일곱 분이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일곱 분이 김종한 안드레아, 고성운 요셉, 고성대 베드로, 김희성 프란치스코, 구성열 바르바라, 이시임 안나입니다. 이 분들이 순교하신 음력 11월 1일이 그 당시의 날짜 계산으로 치면 바로 오늘 12월 19일이라고 해서 오늘 이 미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을해박해 순교자 14분 중에 11분이 2년 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시복식에서 복자로 선포되었습니다. 복자가 되지 못한 세 분은 안치룡, 김흥금, 김장복인데 세례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관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했고 신앙 때문에 옥에 갇혔고 신앙 때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순교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2차로 시복시성대상자에 올라갔고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을해박해로 경상도 북부지방의 여러 교우촌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지방 관영에 끌려갔던 교우들이 처음에는 70여명이었는데 나중에 대구 경상감영으로 압송된 사람은 30여명이었고 결국 순교한 사람은 14명이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마도 병사한 사람도 있겠고, 그냥 훈방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배교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만큼 순교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순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평소에 신앙생활을 철저히 해야 하겠지만, 이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을해박해는 대구와 경상도에 천주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을해박해로 인해서 대구에 최초로 천주교 신자의 발길이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을해박해로 인해 대구 사람들이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를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감영에서 재판받던 모습이나 관덕정 언덕에서 치명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을해박해로 옥에 갇히게 된 사람들 때문에 그 가족들이 대구 근교의 한티나 신나무골 같은 신자촌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을해박해 순교자들은 대구에서 순교하신 최초의 순교자들이고 이분들이 뿌리신 땀과 피가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 되어 오늘의 우리들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분들 중에 11분이 이미 복자가 되셨고 나머지 세 분이 하느님의 종으로 선종되었습니다만, 모든 분들이 성인이 되실 때까지 열심히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도 그분들의 모범을 따를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을해박해의 순교자들과 한국의 모든 성인성녀들이여,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