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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태오 같은 사제 (대구대교구 4차 사제피정 파견미사 강론
   2014/07/05  12:0

사제피정 파견미사


2014. 07. 04. 한티 4차

 

 오늘로서 우리 교구 사제 연중피정이 모두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3차와 4차 피정을 지도해주신 이연학 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마테 9,9-13)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라는 사람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세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 당시 세리가 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는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 중에는 사회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변변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보통 사람들, 변변찮은 사람들, 더구나 세리와 같이 죄인 취급 받던 사람까지 당신 제자로 쓰시겠다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예수님의 기준이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별로 잘 난 것이 없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사제로 쓰시겠다고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거기에는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유대인 랍비가 세리나 창녀들과 같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식사까지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하고 비난을 쏟아냅니다. 

 바리사이들이 사람을 보는 기준은 ‘율법 규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는 기준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 하느님을 얼마나 진정으로 찾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세리든 죄인이든, 예수님은 늘 가까이 다가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은 구약에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 말씀하신 하느님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저희 사제들이 마음에 담아야 할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우선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수없이 들어왔고 또 말하여 왔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부자나 잘 난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죄인이나 가난한 사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꺼리는 사람을 잘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우리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만나시고 가까이 하십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교황님은 밖에 나오면 늘 많은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만나십니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군중 속에 묻혀 계시면서 나무에 올라간 자캐오를 예수님은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진정으로 만나게 되면 사람이 변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본당에 몇 백 명, 혹은 몇 천 명의 신자가 있지만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뒤쳐진 사람,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착한 목자의 모습이고 현재 교황님께서 보여주시고 계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요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전 세계인의 관심사항이 되었습니다. 교황님에 관한 수많은 언론보도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산타 마르타 경당에서 하신 매일미사 강론이 일주일 후면 번역이 되어 제 컴퓨터와 휴대폰에 이메일로 날라 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깊은 파장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들에게 권하시는 삶의 방식과 그분의 삶이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복음 말씀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시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분도 인간입니다. 유대인 랍비와의 대화집인 ‘천국과 지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교도소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몹시 힘들어 그곳에 가는 게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늘 거기에 갑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직접 함께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내’가 기준이 되어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고 하는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도소 안에 있는 사람이 기준이고 가난한 사람이 기준이며 하느님이 기준인 것입니다. 이게 저희들과 다른 점인 것 같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언젠가 로마신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복음서에 나오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 마리가 아니라 아흔아홉 마리가 밖에 있습니다! 제발 좀 울타리 밖으로 나갑시다! 우리는 고작 한 마리, 잘해야 몇 마리 양들과 함께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울타리 밖의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찾아 나서야지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쉬운 것으로 치자면, 집 안에서 한 마리 양이나 잘 돌보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럼요. 훨씬 쉽고 말구요. 털이나 잘 빗겨주고 쓰다듬어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털이나 매만지는 미용사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리 마태오에게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대구대신학교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 부르심은 우리들에게도 있었습니다. “나를 따라라.”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을 했고 지금까지 그분을 따른다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분을 잘 따랐는가?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돌아봐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뒤를 쫒는다.’는 것이고 그분을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고 본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