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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상돈 회장님을 기리며...(서상돈 회장 서세 100주년 추모미사 강론)
   2013/08/07  16:38

서상돈 회장 서세 100주년 추모미사


2013. 8. 6. 주교좌계산성당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회장님께서 1913년 6월 30일에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6월 30일이 음력이라고 하니까 양력으로는 오늘인가 봅니다. 오늘 회장님의 서세 100주년을 맞이하여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엄청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서상돈 고택에서 기념식을 무사히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분의 신앙의 숨결이 묻어있는 이곳 주교좌계산성당에서 추모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미사를 통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회장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우리들도 그분의 신앙과 선행을 본받아 열심히 살아갈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면 좋겠습니다. 

 

 2년 전에 우리 교구는 교구설정 100주년을 지냈습니다. 우리 교구의 지난 100여년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공로자를 꼽으라고 하면 저는 성직자로서는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과 김보록 로베르 신부님을 꼽겠습니다.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은 우리 교구 초대 교구장으로서 27년간 사목하시면서 교구의 기초를 단단히 다져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김보록 로베르 신부님은 초대 대구본당 신부님이시자 계산주교좌본당 주임으로 34년 동안 헌신적으로 사목하셨습니다. 이 두 분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성직자로서 조선말에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들어와서 특히 우리 교구에서 사제생활 대부분을 바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다음 평신도 한 분을 꼽으라고 하면 지난 교구 역사에 있어서 훌륭한 수많은 평신도분들이 계시지만 그 중에서도 저는 서상돈 회장님을 꼽고 싶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잘 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오늘 회장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 기회에 회장님의 생애와 삶을 다시 돌아보는 것이 우리 영신생활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서상돈 회장님 집안이 천주교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것은 4대조 서광수 할아버지 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에 연루되어 달성서씨 문중에서 파적을 당하였고 이어 박해가 시작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경상도 상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후 회장님의 조부 때부터는 문경 여우목에서 살았고 부친께서 결혼하여서는 김천에 와서 살았는데 그 때 서상돈 회장님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회장님이 열 살도 채 되기 전에 부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은 그 후 모친과 동생과 함께 대구 새방골 죽전으로 이사를 와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세 분의 삼촌이 순교하는 일이 생깁니다. 백부 서인순은 경산에서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둘째 삼촌 서익순은 칠곡 한티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며, 막내삼촌 서태순은 문경 한실에서 붙잡혀 상주에서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조카 서상돈 회장께서 상주에서 순교하신 삼촌 서태순(베드로)의 시신을 한티로 메고 와서 매장하였던 것입니다. 서태순 베드로 순교자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조선왕조순교자 제2차 시복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한티에 있는 서태순 순교자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축복을 한 일이 있습니다.

 서상돈 회장님은 나중에 대구에서 제일가는 갑부가 되었어도 이렇게 순교하신 삼촌들을 생각해서 절대 쌀밥을 드시지 않고 근검절약하며 전교와 자선사업에 힘을 쓰셨다고 합니다. 

 회장님은 대구본당이 계산동에 자리잡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처음에 김보록 로베르 신부님께서 한옥 기와집으로 된 십자형 성당을 지을 때에도 큰돈을 봉헌하였고, 얼마 후 그 한옥성당이 화재로 불타버리고 다시 벽돌로 고딕식 새 성당을 지을 때에도 큰돈을 희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장님은 우리나라 두 번째 교구인 남방교구가 대구에 오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고 남산동의 큰 땅을 희사하여 교구청과 수녀원과 신학교가 자리잡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조선교구장이셨던 뮈텔주교님께서 전라도 전주와 경상도 대구를 두고 교구청을 어디에 둘까를 고민하셨다고 하는데 서상돈 회장님을 비롯한 몇몇 평신도들이 교구청이 대구에 오도록 소위 유치활동을 펼친 덕분에 대구보다 역사가 깊고 신자가 많았던 전주에 가지 않고 대구에 왔다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부산과 서울 사이에 경부선 철도가 놓임으로써 교통의 편리함과 발전 가능성이 전주보다 대구가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리하여 1911년 4월 8일부로 대구대목구가 설정이 되었고, 초대교구장으로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께서 그 해 6월 11일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주교서품을 받고 6월 26일에 기차를 타고 대구에 부임하셨는데, 머무를 마땅한 집이 없어 서상돈 회장님은 사촌 여동생 서마리아에게 빌려준 기와집을 임시 주교관으로 사용하도록 해드렸다고 합니다.

 하여튼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회장님은 대구본당과 대구교구에 참으로 큰 공로를 끼치신 분임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2년 전 우리 교구가 설정 100주년을 맞은 2011년 4월 8일에 남산동 교구청 경내에 서상돈 회장님의 흉상을 제막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는 이곳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제2차 교구시노드 개막미사를 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상돈 회장님은 이렇게 교회 내에서만 활동하시고 공로를 쌓으신 분이 아닙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려는 일제에 맞서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로서 자주 독립운동에 앞장서왔던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1907년에는 광문사의 김광제 선생님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셨던 것입니다.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취지문의 마지막 글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감히 이에 발기하여 피눈물로 고하노니 우리 대한(민국) 백성은 이 취지문을 보시고 한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서로 알려 기어코 국채를 보상하여 위로는 황제의 밝은 뜻에 보답하고 밑으로는 우리 강토를 유지할 것을 복원하는 바이노라.”

 전국적으로 수많은 호응을 얻었던 국채보상운동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인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만, 서상돈 회장님은 평생 교회와 조국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던 것입니다.

 1999년 광복절을 기해 정부에서는 서상돈 회장님의 공로를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신문사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서상돈상을 제정하여 격년으로 민족경제에 기여한 사람에게 시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구시에서는 국채보상공원을 만들고 기념관을 세워서 그분의 애국애족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몇몇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는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고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주님께서 가시는 길이 비록 십자가의 길이고 수난의 길이지만 그것은 결국 영광스러운 부활의 길임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서상돈 회장님과 선조들이 교회와 나라를 위해 보여주었던 희생정신과 순교정신, 그리고 나눔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번영된 이 교회가 있고 이 나라, 이 민족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들이 피땀으로써 지켜온 이 신앙과 정신을 우리들이 잘 살고 보존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잘 물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일러준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히브 1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