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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든 것은 은혜요, 은혜는 어디에나 있다(연중 제27주일)
   2007/10/04  22:3

모든 것은 은혜요, 은혜는 어디에나 있다(루카 17,5-10)

어떤 사람은 선행을 하거나

막대한 재산을 만들거나

온 세상의 인기를 한 몸에 모았다고 해서

자기의 능력을 자랑한다.

하느님이 섭섭해 하지 않으실 만큼

혹은 죄의식이 없어서 잘 살아 왔다고 여긴다.

자기가 지닌 장점과 성취한 업적을

자기의 인간적인 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대인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아내나 남편에게

“나 같은 남편(아내)을 모신 당신은 정말 복이 많구려” 하고 말하거나

“우리 가정에 성공과 번영이 깃든 것은 다 당신 덕분이오”

하고 말하는 상대방에게

“아니오. 다 당신 덕분이오”나

“그렇게 아니 다행이군요”

하고 대답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더라도

뽐내거나 그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단언하셨다(루카 17,7-10).

하느님께 대한 순명은 공로가 아니라

의무이행에 지나지 않고,

구원도 그분의 자비로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하고 대단한 선행을 한 뒤에도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에서 비롯되고

자기는 다만 무익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야 한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1고린 9,16)

당연한 의무이다.

모든 인간적 자랑을 포기하고

자력구원관에서 해방되어야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믿음은 인간적인 성취나 공로를 완전히 배제하고

조건 없이 책임을 다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은혜요 이웃의 공로라고 여기는 것은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이와 반대로,

자기를 남편(아내)이나 친구나 이웃으로 모시는 것을

복으로 여기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과 인격관계를 맺을 수 없고

사랑할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 대전에서

쓸모없는 종으로 자처해야 하는 이유는

선행을 할 능력을 잃어버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혐오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

  실상 나는 선이 내 안에,

  즉 내 육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것을 원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

  나는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로마 7,15.18-19.24-25).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하느님의 구원은혜가 있다.

각자의 장점을 찾아내어 기록해두고

더 많은 장점을 만들거나 찾아내며

이런 장점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자.


 

신앙생활은 예수께 다 자란 나무를 한 그루 받아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작은 씨 하나를 받아 큰 나무로 키우고

꽃을 피우는 것과 비슷하다.

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순간적 결단에 그치지 않고

평생 이 뜻에 따라 사는 여정과 같은 것이다.

날마다 커지지 않는 믿음은 죽어버리고 만다.

믿음은 사랑처럼 끊임없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타성에 빠지고,

타성의 노예가 되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하느님이 날마다 믿음을 증대시켜 주시도록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야 하겠다(루카 17,5-6).


              참고도서

1) 박영식, <루가 복음 해설 5. 루가 16,1-21,38. 새 본문 번역과 해설. 성경의 세계 신약 8> 성바오로 2005, 67-73.

2) 박영식, <말씀의 등불. 복음의 진미[가해]> 가톨릭신문사 2007년 11월 초 출간 예정, “연중 제31주일의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