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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금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자들
   2008/11/07  7:43

지금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자들

 

요한복음 2,13-22(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예수님은

당대 사제들이 돈벌이를 위해 더럽힌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셨다.

성전 바깥마당인 ‘이방인들의 마당’에서

소와 양을 파는 상인들을 짐승들과 함께,

환전상들을 돈과 함께 내쫓으셨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

비둘기를 파는 이들에게는

걷어치우라고 이르기만 하셨다.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소와 양이 있었다는 것은

허용되기 어려운 예외적인 현상이다.

짐승들이 성소를 더럽히기 때문이다.

당시 최고의회와 알력관계에 있던

카야파 대사제가

자기 적수인 최고의회 의원들에게

호의를 베푼 상인들의 경쟁자들인

다른 상인들에게 성전 경계선 안까지

마구간을 세우는 것을 허락한 것 같다.

또 환전상들은 순례자들이 성전세

반 세켈(= 2데나리온 = 이틀 동안의 노임)을

낼 수 있도록

로마제국의 데나리온이나 그리스의 드라크마를

티로의 동전으로 바꿔주었는데,

환율차이로 작은 이익을 챙겼다.

황제나 유명인사의 초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이나 드라크마로는

성전세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쫓아냄으로써

예루살렘에서는 모든 것이 거룩해지고

성전에 장사꾼이 없는 날이 올 것이라는

즈카르야의 예언(즈카 14,21)을 실현하셨다.

그러나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차서

당대 지도자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하느님의 성전을 이용하여

돈벌이에 눈이 멀고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단죄하셨다.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그들의 권력기반과 기득권을

위태롭게 하신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득권이나

재물에 혈안이 된 나머지

예수님을 본시오 빌라도에게

‘유다인들의 왕’이라는 정치범으로 고발하여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선동했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 지도자들과는 반대로,

하느님과 재물을

한꺼번에 섬길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겠다. 

나무가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릴 줄 알기 때문에

새 잎을 내듯,

탐욕과 이기심을 버려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사랑과 공정과 진리를 실천하는 곳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재물과 기득권에 혈안이 되어 

하느님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당대 지도자들의 죄는 오늘 우리도 짓는 죄이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하느님은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이기적 타산을 모르는

깨끗한 마음속에 임하신다(2티모 2,22).

또 이러한 마음속에만 사랑이 깃들 수 있다.

 

“사랑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그분의 현존을 증명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성체성사를 포함한 모든 예배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여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그분의 뜻에 부합하는

참된 예배가 된다(마태 9,13 = 호세 6,6)”

(박영식, <성경과 주요교리> 235).

 

교회의 힘은 인간적 자질이나

사업체나 부동산이 아니라

자비로운 인격이다.

이런 뜻에서 예배나 기도가

또 성공한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그들은 거의 품위 있고

예의가 바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정치나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인격이다(Samuel Smiles).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훌륭한 인격이 목적이다.

재산을 잃을 땐 손실이 없다.

건강을 잃을 땐

약간의 손실이 있다.

인격이나 명성을 잃을 땐

모든 것을 잃는다.

 

* 오늘 주일 복음 해설은 <말씀의 등불 II> 119-127쪽

 

 

                    신간안내

 

박영식, 말씀의 등불. 주일 복음 묵상, 해설(나해).

가톨릭신문사 2008년

 

위의 저자, 구약성경에서 캐내는 보물[1]. 모세

오경의 주된 가르침. 가톨릭 출판사 2008년

 

위의 저자, 구약성경에서 캐내는 보물[2]. 전기

예언서(역사서)와 후기 예언서의 주된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