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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원은 가난과 고통과 슬픔이 있는 곳에 있다(대림 제2주일)
   2009/12/04  8:43

구세주께서는

가난과 고통과 슬픔이 있는 곳에  오신다

(루카복음 3,1-6)

 

 

세례자 요한은

티베리우스 황제(기원후 14-37년)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기원후 26-36년)가

유다 총독이었을 때

유다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여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외쳤다.

티베리우스가

기원후 14년 9월 17일에

황제로 인준되었기 때문에

그의 치세 15년은

28년과 29년 사이였을 것 같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 메시아께서는

당대 초강대국인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유다에서 대중 앞에 나타나셨다.

이는 정치⋅경제적으로 막강하고

풍족한 것에 의지하려는

인간적인 기대와는 반대된다.

구세주가 방글라데쉬에 오셨다는 말이

미국에 오셨다는 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겠는가?

그러나 온전한 해방은

정치인들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메시아께서

베푸시는 선물이다.

이는

거만하고 오만한 강자에게는

하느님의 구원을

무시하게 되는 걸림돌이다.

 

예수 메시아와 선구자 세례자 요한은

절망의 시대

강자의 억압을 받고 있는 이들 가운데

오셨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바로 저버림 받고

척박하고

가난한 땅 유다 광야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초강대국 로마제국의 점령 밑에서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작은 땅,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독선과 횡포를 자행하는 상황,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에

하느님의 저버림을

받은 것 같이 보이는 땅에서

실현되기 시작되었다.

 

구세주께서는

번영과 성공을 누리는 곳에

계시지 않고

가난과 고통과 슬픔이 있는 곳에

오신다.

하느님은 당신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임하신다.

슬픔이 있는 곳이 성지(聖地)이다.

하느님은 슬픔이 있는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슬픔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구원이 있는 법이다(Shakespeare).

그런데도 우리는

구세주께서

물질적 번영과 성공을 이루어주고

욕망을 채워주시는 분이라고

착각하지 않는가?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여

인류의 구세주로 구원을 베푸실

예수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외쳤다.

‘회개’의 그리스 원어는

마음을 바꿔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을 청산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한다.

회개는

하느님과 이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는

교만과 이기심을 버리고

오히려 자기가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처신해야 성립된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겸손하게 순종하는 이들이

구원을 체험한다.

그러나 달팽이처럼 자신에 집착하고

세상잡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예수 메시아를 맞이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법이다.

하느님의 뜻과

이웃의 행복보다

자기 욕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의 이깃믕ㄴ 인류가 하느님께 받은

심판 중에서 가장 참담한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선포하는 사람만이

영생을 희망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도 십계명만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 이다.

 

 

 

 

                            신간안내

 

 

박영식, 신약성경에서 캐내는 보물[1]. 마르코

    복음․마태오복음․루카복음․사도행전의 주된

    가르침. 가톨릭출판사 2009년

    판매처: 복현성당, 바오로딸, 계산서원,

                  성바오로서원

 

위 저자, 구약성경에서 캐내는 보물[1]. 모세

     오경의 주된 가르침. 가톨릭 출판사 2008년

 

위 저자, 구약성경에서 캐내는 보물[2]. 전기

    예언서(역사서)와 후기 예언서의 주된 가르침.

    가톨릭 출판사 2008년.

 

위 저자, 말씀의 등불. 주일 복음 묵상, 해설(나해).

     가톨릭신문사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