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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을 고생은 하느님이 주시는 최상의 복이다(성지주일)
   2010/03/27  8:4

죽을 고생은

         하느님이 주시는

최상의 복이다.

 

 

루카복음 23,1-49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 북쪽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서

범인 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로마 군인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예수님은 원수들이 의인을 박해하고

주사위 놀음으로 그의 옷을 빼앗는다는

시편(22,19)의 예언대로

원수들에게서 박해를 당하는

의인의 본보기가 되셨다.

처형자들은 십자가형을 집행할 때

관례대로 주사위 놀음을 하여

사형수의 옷을 차지했다.

사형수는 죽기 전에

관중 앞에서 발가벗겨졌다.

예수님도 목숨만이 아니라

옷과 인간적 품위까지 빼앗기셨다.

또한 유다의 지도자들과 군인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면서도(루카 7,50; 8,48.50) 당신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며

예수님을 놀리고 있었다.

 

“이 자가 정말

  하느님의 그리스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보라지”(루카 23,35).

 

예수님은 원수들의 조롱을 받는

의인의 운명(시편 22,7-8)을 당하셨다.

군인들은 신 포도주를 예수께 드리며

정치적 뜻인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자신을 구원하라고 빈정거렸다.

군인들과 유다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신분을 잘못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 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패도 붙어 있었다”(루카 23,38).

 

제사장들은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셨을 때에도(마르 14,58)

무질서와 소요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보고

예수님을 미리 제거해야 할

위험한 인물로 여겼다.

빌라도도 제사장들의 고발을 듣고

예수님이

로마제국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분이라 여기고

그분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시어

참된 유다인들의 왕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실 것이다.

 

죽을병을 앓아

고통과 불행의 극치를 체험해본 사람은

건강했을 때보다

더 단련되고

더 강인해지며

약자들의 입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고통이 인간성숙과

행복의 원천이고

고통 속에 기쁨과 구원이 있음을 깨닫는다.

화초가 가장 아름다운 것을 버릴 줄 알기에

새 잎을 내고

새 꽃을 피우는 것과 비슷하다.

나아가서 이기심이나 자기중심주의를 희생하는

고통을 겪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주는 행위이다.

자기희생은 슬픔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위대한 인품이 될 희망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타인을 도울 때를 제외하고는

  고독하다”(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크고 작은 고난과 시련을

불행으로 여기지 말고

위대한 인생을 만들어주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여기자.

 

나의 가족들과 협력자들과 친구들뿐만 아니라

원수들의 이름을 써놓고

각 이름 옆에

내가 그를 위해 버려야 할

집착이나 이기심이나

선입견이나 증오를 열거해보자.

어떻게 그것들 대신에

사랑이 자리 잡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나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이웃이 원하는 모습으로

이웃이 원하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신간안내

 

박영식, 말씀의 등불 III. 주일 복음 묵상․

   해설(다해). 가톨릭신문사 2월 18일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