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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부활 제6주일)
   2010/05/08  8:29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요한복음 17,20-26

 

 

요한복음 17장은 ‘

사제이신 예수님의 기도’라고 일컫는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시듯,

제자들도 모두

당신의 말씀으로 하나 되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예수님이 원하신 일치는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과 일치하고(수직적인 일치)

기도와 사랑에 힘입어

서로 하나 되는 것이다(수평적인 일치).

일치의 핵심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일치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고

그에게 당신의 생명을 베풀어

아들과 일치하신다.

제자들은 바로 이 일치에 참여하여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받는다.

일치의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여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셨음을

이 세상이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가

위대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1)

 

라는 기도는 가톨릭교회와

갈라져나간 교파들의 일치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이는 요한 복음사가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것이다.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경우가 많다.

마음은 동정심으로 넘치지만

표정은 짜증스럽기만 하다.

마음은 간절히 원하면서도

행동은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

생명과 행복을 누리려면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일치가 필요하다.

선을 지향하는 자아와

악을 저지르고 마는 자아,

이 두 자아가 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인간조건을 원죄라 한다(로마 7,13-24).

죄의 뿌리인 이기심에 사로잡히면

가정이나 공동체 안에서

분열과 불화를 초래한다.

가족들 중 누구 때문에

남편, 아내, 자녀들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우리의 가정은 상처를 입는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할 경우

그것은 다만 그의 모습을 통해

자신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것이다.

자신 속에 없는 것은

절대로 자신을 흥분시키지 않는다(H. 헤세).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나를 화나게, 기분 나쁘게, 우울하게,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어떤 요인 때문에 그렇게 된다.

외부의 요인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상처나 약점을 자극하는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내 감정의 책임을

외부의 어떤 것이나

타인에게 돌리는 것은

내 안의 요인에는 눈을 감고

외부의 자극만을 원망하는 착각이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우리 모두의 일치는

원죄를 용서받아

내적인 갈등에서 구원받는 데서 시작한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은

남을 비난하고,

남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이 비난받을 짓을 많이 행하기 때문이다.

 

"개 눈에 뭐밖에 안 보인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남도 용서할 수 없고,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다.

자기의 장점을 찾아내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남의 장점을 발견하여

그를 사랑할 수 있다.

남을 사랑해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타인을 신뢰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남을 신뢰할 수 있다(E. 프롬).

 

“아는 것만큼 본다.”

 

남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점만 보고

자기가 모르는 장점은

남이 지니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남의 장점을 찾아내는 것은

자기의 장점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이처럼 자기의 장점을 찾아내어야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고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자기 자신과 대화해야 하겠다.

방 안에서 소리를 내어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를 용서하고 칭찬하고 사랑하면

남을 용서하고 칭찬하고 사랑할

힘이 생기는 법이다.

 

우리의 일치는

선을 하겠다고 하고서는 악을 저지르고 마는

우리의 내적인 불일치와 갈등을

자기 사랑의 힘으로 이겨내는 데서 시작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나와 너 사이를

갈라놓는 자기중심주의를 죽이고

서로 일치시키는 힘이다.

이러한 힘을 갖춘 사람만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을 하는 것은 즐겁지만

사랑을 받는 것은 즐겁지 않다(아리스토텔레스)고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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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식, 말씀의 등불 III. 주일 복음 묵상․

   해설(다해). 가톨릭신문사 2월 18일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