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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종은 나인데..."(사순 제1주일)
   2014/03/08  10:47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사순 제1주일)

 

마태오복음 4,1-11

 

아버지가 선물을 사가지고 오시면 자녀들이 우르르 아버지 둘레로 모여든다. 어머니는 선물 수와 크기를 공평하게 만들어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수와 크기에 차이가 나면 큰일이 난다. 자기 몫이 형이나 언니의 것보다 하나라도 적으면 어머니가 그만큼 자기를 덜 사랑하시는 것이라고 여기고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친다. 이처럼 숫자는 분쟁과 싸움을 낳고 많은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많다’, ‘적다’, ‘똑같다이러한 숫자놀음 때문에 우리는 작은 차이에 잡착하게 되는 까닭이다. 이 이치는 어른들에게도 적용된다. 숫자는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대우와 사랑을 받는지를 가리는 기준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숫자는 이러한 차이뿐만 아니라 재물의 축적을 뜻하기도 한다. 숫자는 더 많은 숫자를 요구하는 악마 같은 마력을 휘두른다. “더 많은 가구, 더 많은 애인, 더 푹신한 의자, 더 높은 명성, ‘, , ...’란 말을 외쳐대다가 사람들은 죽어간다. 페르시아 궁전 같은 사치를 주어도 인간은 가난하게 죽어간다.”(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문학사상 200924) 세배 돈을 십만 원, 이십만 원을 받아 통장에 저축해두면 부자가 되어 마음이 든든해지고 기고만장해지며 남을 무시하기까지 한다.

 

결혼식을 올릴 때 부부가 각기 짐을 다섯 개씩 나누어지고 가기로 하고서는 몇 년도 되지 않아 한쪽은 일곱 개, 다른 쪽은 세 개만 지고 가기도 한다. 부부관계를 숫자로 계산하면 한쪽이 억울해서 못 살겠다고 하고 이 둘 사이에는 사랑이 사라지고 없다. 한 생애를 그에게 다 주었는데도 배신만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랑을 계산한 사람으로서 참된 사랑을 하지 못한 것이다. 숫자에 둔감해야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사랑의 무게, 부피 들 투자한 만큼 보답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계산과 확인을 하지 말고 오로지 더하기만 하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많이 기다리고 참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람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씨앗을 심는 사람은 슬픔과 고통을 거름으로 사랑을 키워야 한다. 여기에 그의 행복이 달려 있다.

 

많이 살수록 값이 싸다. 두개를 사면 두 개를 더 주는 관습이 폼페이에 있었다. 그러나 태국에서는 물건을 더 많이 사는데 더 많이 지불하는 셈법을 따른다. 이 이상한 계산법은 불교국가 특유의 사고방식으로서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 이상한 계산법은 인간관계에 적용되기도 한다. 단출한 관계에는 별로 부담이 가지 않는 반면, 친할수록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부모이기 때문에, 부부이기 때문에, 친척이기 때문에, 친구이기 때문에, 이웃이기 때문에, 더 많이 배려해주고, 더 많이 희생해야 하는 법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마음의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만이 사랑의 무지개를 볼 수 있다. 이 무지개는 더 힘든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사랑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그 매혹의 술에서 깨어 나버리고 만다. 영원히 그 매혹의 술에 취해 살게 해주자.

 

람이나 사물의 본질, 사랑, 우정, 고귀한 인격은 숫자에서 탈출했을 때에만 다다를 수 있는 초월적인 보물이다. “말하자면 사물을 셀 때 우리의 시선은 그것들의 모양이나 본질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아름다운 꽃도 하나고 미운 꽃도 하나다. 숫자는 개성과 감상을 허락해 주는 일이 없다.”(이어령, 위의 책, 104) 사람의 내적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숫자에서 해방되고 감성과 이성과 의지를 총동원하여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맺는 사람이다. 이와 반대로, 숫자에 집착하는 사람은 참된 대인관계를 할 기본 능력을 잃고 황금만능주의에 빠진다. 또한 수가 있는 이상 모든 것은 유한하다. 무한 그리고 영원. 그것은 숫자에서 탈출했을 때에만 이를 수 있는 초월이다.”(이어령, 위의 책)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야이, 야이, ,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사랑, 정의, 진리처럼 영원히 존속하는 초월적인 가치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영원하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다. 그러지 않고 숫자를 붙잡고 늘어지면 무신론자가 되고 만다. 하느님을 배제하고는 사랑도 우정도 신의도 무너지고 말며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굶주림과 싸우며 하느님의 기적적인 관여를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당신이 하느님께 받은 메시아의 권능을 당신 자신을 위해 남용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음을 시험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셨다. 광야의 악조건 속에서 초인적임 힘을 바란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치병에서 해방되려는 충동과 같은 유혹을 이겨내셨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광야를 건거가든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느님보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싶은 유혹을 느끼셨으나 목숨을 다 바쳐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하셨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전 인류를 이기심을 조장하는 숫자놀음에서 해방하고 영원히 사랑할 힘을 주셨다. 지금 나에게 사랑이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요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그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유혹은 우리가 모두 한평생 받는 유혹과 비슷하다. 나는 의식주나 건강을 위해 기적적인 방법에 의지하거나 부귀영화를 획득하기 위해 하느님을 찾는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하느님을 저버리고 돈과 권력과 부귀영화를 최상의 가치로 추구하라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는 원인이 숫자에 집착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숫자를 중요시하는 가치관 때문에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사랑과 진리와 신의를 헌 신짝처럼 버리고 약육강식의 세계에 뛰어들어 헐벗고 굶주리며 폭력과 불의 희생이 되고 있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제 배를 채우기에 급급해 하지는 않는가?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7,24). 는 사용하기 위한 도구이지, 숭배하기 위한 신이 아니다.

 

 

숫자, 공식, 계산, 계약, 논리에 익숙한 사람은

날마다 명상에 스며들어 하느님을 체험하고,

시 한편을 읽고,

음악과 그림을 찾는 마음이 필요하다.

 

 

잘 읽히는 책

판매처: 바오로딸, 성바오로, 가톨릭출판사

박영식, 말씀의 등불. 주일 복음 묵상 · 해설(가해). 가톨릭출판사 2007.

---, 루카 복음(예수의 유년사). -루카복음 1-2. 입문, 새 본문 번역, 해설? 도서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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