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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금 행복해야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간다(연중 제3주일)
   2009/01/23  9:5

지금 행복해야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간다

 

마르코복음 1,14-20

 

히말라야 민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으면

서로 마음이 통해

애욕에 빠져든다.

아이를 낳아 길바닥에 버려두면

행인들이 손가락을 빨려

이레 만에 어른으로 크게 한다.

대소변을 보면

땅이 갈라졌다가 아문다.

종일 누워 있고 싶으면 누워 있고,

앉아 있고 싶으면 앉아만 있어도 된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생각만 하면

해결되기 때문이다.

죽음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이러한 낙원은

이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낙원이 아니다.

그곳은 악을 많이 저지른 사람이

가게 돼 있는 무위지옥(無爲地獄)이다

 (이 규태, 無爲地獄).

 

이 히말라야 민화가 가르치는 것은

아무 할 일 없이

편할 대로 사는 것이

낙원이 아니라

오히려 가혹한 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이

더욱 소름끼치는

형벌이요 지옥이다.

사람이 피곤할 때는

노동할 때가 아니라

한가할 때이다.

행복이나 영원한 생명은

불로소득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상이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가난, 이타주의, 사랑, 보은(報恩)이다.

천국이란 죽은 뒤에

극락도원(極樂桃園)에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세에서 가난하고

시련을 겪고 험난한 앞날을 해쳐 나가며

성취와 생명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천국이다.

 

아파본 사람은

고통에 비례해서

좋은 것을 얻는다.

죽음의 문 바로 앞까지 가본 사람은

생명의 충만함을 느낀다.

모자란다는 것은 그 자체가

위대한 가치를 낳는다.

가난하면 마음이 겸허해지고

모든 사람이 다 아름답고,

모든 사람이 고마운 분이고,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

 

하느님의 왕국에서 사는 사람은

어떠한 특정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특정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성품에 결함이 없는 이가 행복하다.

성실, 온화, 헌신이 행복을 조성한다.

집착과 강박의 고통을 빨리 버리고

덕을 닦은 사람이

행복해지고

천국에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속이지 말고

자신에게 솔직하고

충실해야 하겠다.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은

사랑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

 

남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행복이 결정된다.

남을 행복하게 하려고

애쓴 만큼

자기도 행복해진다(플라톤).

그러나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내가 알기로,

  당신들 가운데 정말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 일하는 길을 찾고

  그것을 얻은 사람이다”(A. Schweitzer).

 

성인(聖人)이 되어야

하느님의 왕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성인은 좋은 습관과

좋은 성격을 연마하여

하느님을 향한 사람과 이웃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데

습관이 된 분이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우리도 행복해질 권리와

의무가 있다. 

 

 

                            신간안내

 

박영식, 말씀의 등불. 주일 복음 묵상, 해설(나해).

   가톨릭신문사 2008년.

 

위의 저자, 구약성경에서 캐내는 보물[1]. 모세

   오경의 주된 가르침. 가톨릭 출판사 2008년

 

위의 저자, 구약성경에서 캐내는 보물[2]. 전기

   예언서(역사서)와 후기 예언서의 주된 가르침.

   가톨릭 출판사 2008년